PLACE

문화공간 양

Culture space yang

PROFILE

김범진 관장
1974년 제주에서 출생
2013년~현재 <문화공간 양> 관장

김연주 큐레이터
1971년 서울에서 출생
2013년~현재 <문화공간 양> 큐레이터

예술로 말을 건네고 반응하는 선순환을 꿈꿔요.

이곳은 뭐든 끊어지는 법이 없다. 큰길에서 미끄러지듯 내려가면, 안거리와 밖거리 사이를 관통해 돌담 사이의 또 다른 농가 주택으로 이어진다. 외가댁 삶의 흔적이 노릇한 말을 걸어오고, 아흔을 바라보는 동네 어르신이 산책길에 이곳 문을 똑똑 두들긴다. 공간과 사람, 사물 그리고 과거와 현재, 미래 사이에서 <문화공간 양>은 기꺼이 중매자이길 자처했다. 예술의 끈질긴 힘이었다.

사실 미술관이나 화랑, 대안공간 등의 이름으로도 이곳을 표현할 수 있을 텐데요. ‘문화공간’은 애초 지역 연계를 활발히 하고자 하는 의미로 붙여진 정의인지요?
김연주 ‘삶과 더불어 함께하는 예술’로 이 공간을 줄곧 표현해왔어요. 그런데 미술관, 화랑, 대안공간과 같은 기존 용어는 저희가 하려는 바를 담아낼 수 없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고민 끝에 문화공간이라고 정했습니다. 전시만 이뤄지는 곳이 아니라 마을 주민과 함께 다양한 활동을 해 나가는 공간이라는 성격을 담기에 적절한 단어였죠. 그 뒤의 ‘양’은 누군가를 부를 때 쓰는 제주어예요. 문화와 예술로 말을 건다는 의미죠. 관장님의 외할머니 성씨가 양 씨이기도 했고요. 제주 여성은 예부터 강했지만 상대적으로 사회적 위치가 그리 높지 않았어요. 그분들에 대한 존경의 마음과 더불어 소수자의 문제에 대해 고민하는 공간을 만들겠다는 의지도 있었죠. 관장님과 함께 공간을 시작해서 둘 양(兩)의 의미도 담고 있어요.

외가댁을 문화공간으로 재탄생했는데, 관장님은 이 집에 대한 기억이 있나요?
김범진 외가가 다 거로마을 출신이에요. 양 씨인 외할머니, 김 씨인 외할아버지 두 분 다요. 조상 대대로 거로에서 살았던 거죠. 거로는 조선 시대 이전 고려 후기부터 6백년 이상 자연적으로 형성된 마을입니다. 외할아버지는 제주도에서 교직 생활을 하셨는데, 4.3 이후 오사카로 공부하러 가서 귀향하진 않으셨어요. 외할머니가 어머니와 이 집에서 계속 생활하셨죠. 아버지 직장 때문에 서울로 올라갔지만, 저만 초등학교 때 방학 때마다 이곳에 내려와 살았어요. 사형제를 모두 돌보기 어려워서 큰아들인 저를 제주도로 보낸 거죠. 큰 방에서 할머니와 제가 같이 살았는데, 마을 분들이 늘 집에 오셔서 이야기를 나눴어요. 어머니가 외동딸이다 보니, 할머니도 절 친아들처럼 아끼셨습니다. 큰 방에 제 발가벗은(!) 돌 사진이 늘 걸려 있어서 싫어했던 기억이 남아 있어요.

함께 생활했으니, 이런저런 추억이 많이 남아 있겠네요.
김범진 친척 할아버지와 이 공간의 윗길로 소달구지를 타고 밭에 가거나 화북포구에 들리기도 했어요. 저기 퐁낭(팽나무) 밑이 바람길이라 해서 어르신이 담소를 나누는 곳이었는데, 퐁낭 아래 집이 바로 여기예요. 이곳으로 내려와 술과 안주를 벗 삼아 두런두런 이야기를 이어 가셨죠. 지금은 전시장이 된 집에 많은 분이 모이시면, 제가 노래를 부르고 용돈을 받기도 했습니다. 돼지를 잡으며 잔치를 벌였던 모습 등 어린 시절의 기억이 가득 담긴 공간이에요. 외할머니는 93세가 되는 올해 돌아가셨어요.

그런 기억 속에서 <문화공간 양>으로 바꿀 결심은 어찌했나요?
김범진 보통 갤러리를 하려고 했다면, 이런 주택을 고쳐서 하려고 생각하지 않았을 거예요. 중산간이나 바닷가의 경치 좋은 곳에 자리해 네모반듯한 갤러리 형태를 지었겠죠. 그렇게 하지 않고 여기서 시작한 건, 마을과 제 기억과 현재의 이야기가 만들어지는 장소에서 예술의 형식으로 타인과 소통하고 싶었어요. 예술의 형식은 전시가 되든 세미나가 되든 토론이 되든 열려 있었죠.

개관 시 기념전은 이곳의 정체성을 더 드러내는 방식이었나요?
김연주 저희가 레지던스 프로그램을 같이 운영하는데요. 입주 작가를 선정하고 그들을 소개하는 전시로 진행했어요. 이 공간의 성격을 보여준다기보다 마을 분들에게 처음으로 인사드린다는 의미가 컸죠. 작가와 <문화공간 양>을 소개하는 자리였어요. 거로에는 어르신이 많이 사시거든요. 보통 예순 살이면 청춘이라고 할 정도죠. 일흔 살 어르신도 막내처럼 느껴져서 노인회도 잘 안 가세요.(웃음) 마을 분들과 작가를 만나게 하고 함께 작업하는 과정을 거쳐 지금에 왔어요.

처음엔 <문화공간 양>에 대한 이해가 어려웠을 것 같아요. 집마다 소개했던 건가요?
김범진 개관 때 마을 분이 오셨어요. 여기서 문화공간을 어떻게 할 수 있을지, 걱정이 많으셨죠. 퐁낭 아래 정현영 작가가 마을 분들과 함께 모자이크 벽화 작업(‘삶의 빛’)을 한 적이 있습니다. 여기에 마을 분들이 오셔서 각자의 작업을 함께 하면서 그를 기록하고 벽화를 완성했죠. 전시도 동시 진행하고요. 이를 통해 마을 분이 <문화공간 양>이 이런 것도 할 수 있다는 이해가 생긴 것 같아요. 함께하면서 점점 알게 되었던 거죠.

<문화공간 양>과 마을 분들이 함께한 접점에는 어떤 것이 있었나요?
김연주 마을의 경로잔치나 단합대회, 화북동 체육대회 등에 작가가 같이 봉사하고 참여해요. 한 해는 화북동 체육대회에서 작가가 마을의 우승을 이끌었던 적도 있죠. 한 작가님이 <문화공간 양>이 마을에 존재해야 하는 이유가 이런 행사에 있다고 이야기할 만큼 마을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문화공간 양>과 작가들이 함께하고 있어요. 관장님이 말씀하신 벽화엔 마을 분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어요. 이를 만드는 과정에서 그분들의 이야기를 듣고 소통하는 시간이 있었죠. 마을 어르신은 본인의 이야기가 담겨 있어 당신의 아들이나 손주가 왔을 때 당신을 기억하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줘서 고맙다고 하세요. 실제로 벽화를 만든 분 중 한 분이 돌아가셨는데, 그분의 손주가 찾아와 할아버님 이야기를 나누고 벽화 사진을 찍어 갔어요. 이곳은 그런 소통의 역할도 하죠.
김범진 퐁낭 밑의 벽화 작업 후 화북초등학교 1~3학년 전 학생들이 참여한 프로그램도 했어요. 그 후 마을 분들이 마을에 벽화가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고 하셨죠. 그러나 우린 긴 호흡으로 함께하려고 합니다. 4.3 이후 집과 함께 모든 것이 다 불탔지만, 마을 사람이 갖고 있던 이야기와 추억이 있는 물건, 그리고 조금이라도 남아 있는 사진을 작가와 함께 계속 기록하고 디지털화하고 있어요. 계기는 어르신 한 분이 자비를 들여 찍었던 마을 단합대회 기록물을 기증해준 것이었죠. 기록 작업을 시작하니, 점점 다른 분들이 자진해서 물건을 기증해주고 있어요. 강의실 옆 전시장에서 무쇠통을 보았나요? 그게 마을 공동목욕탕에 있던 욕조예요. 이곳으로 옮겨서 새로운 이야기가 나오게 되었죠. 단합 대회나 마을 행사 등도 봉사 차원에 그치는 게 아니라 작가와 함께 또 하나의 예술 형태로 참여하게 되었어요. 매년 같이하다 보니, 조금씩 달라져요.

마을 주민과 함께한 또 다른 작가 이야기를 들려준다면요?
김범진 만화를 그리는 정영롱 작가는 8개월간 마을 주민과 가깝게 지내면서 ‘알아집니다’라는 웹툰을 그렸어요. 웹툰 조회 수가 10만 가까이 나왔죠. 그걸 보고 <문화공간 양>에 찾아오는 분도 계셨어요. 민환기 다큐멘터리 감독은 제주에서 2년 이상 다큐멘터리를 찍었습니다. 거로의 할아버지와 <문화공간 양>의 기획자를 다룬 영상이 강정의 이야기와 함께 완성되어 올해 전주국제영화제에 상영되었어요. 사운드 아티스트가 입주 작가로 있으면서, 사운드 퍼포먼스 작업을 해 마을 분과 함께한 적도 있고요. 제주에 거주한 이지연 작가는 마을의 지도를 그리기 위해 어르신과 동네를 6개월간 다니면서 계속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마을의 이야기가 담긴 지도가 만들어졌고, 그 마을의 이야기를 또 다른 어르신이 감수도 해 주셨죠. 만화, 영상, 사진, 일러스트 등 다양한 매체의 작품으로 마을의 이야기가 그려지고 있는데, 실제로 마을 어르신과 매우 밀접한 관계 속에서 결과물이 나오고 있어요.

지난 11월엔 재즈 음악회 ‘밧듸글라’가 열리기도 했는데요.
김범진 ‘분홍섬 공공체’라고 해서 제주 역사 특히 4.3과 관련해서 2014년부터 해온 프로젝트가 있어요. 재즈 피아니스트 겸 작곡가, 전통 침선 공예가, 의상 디자이너, 화가 등 다른 전공의 작가 다섯 명이 모여 공부하고 답사도 하고 협업 전시를 진행했죠. 올해 4.3의 70주년을 맞이해 그동안 4.3을 주제로 작곡한 허성우 작곡가의 음악을 마을 분들께 발표하고자 했습니다. 여기에서 작은 규모로 하려고 했는데, 마을 회장님이 거로마을의 운동장에서 하자고 제안해 주셨어요. <문화공간 양>과 마을회의 공동 주최로 음악회를 열었고, 이백 분 정도 참석하셨죠. 어찌 보면 처음부터 큰돈을 들여 우리끼리 음악회를 할 수도 있었겠죠. 그러나 이런 방식을 우리는 취하지 않았습니다. 매년 자연스럽게 마을 주민과 협업하면서 점차 마을로부터 다른 것을 해보자는 역제안도 받는 순환 구조가 되었어요. 2013년부터 마을과 함께하는 과정과 결과가 엮이고, 그러면서 조금 다른 형태의 작업으로 바뀌어 갔죠. 이번 음악회도 마을과 함께하는 긴 과정 중에 하나로 볼 수 있지 않을까 해요.

레지던스 작가에게 어떤 주제를 강조하진 않았을 텐데, 자생적으로 마을과 협업하게 된 까닭은 무엇일까요?
김연주 마을 안에 있고, 마을 주민과 다양한 작업을 하는 <문화공간 양>의 성격을 알고 작가가 지원해요. 민환기 감독의 경우는 제주를 주제로 한 다큐멘터리를 만들고자 했고, 저희 공간과 오랜 이야기 후에 레지던스에 참여했어요. 종종 마을지도제작 같은, 저희가 하고 싶은 프로젝트가 있을 땐 작가를 별도로 섭외하는 경우도 있고요. 작가가 마을과 소통하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이 걸리는데, 작가와 마을 사이에 <문화공간 양>이 있으면 소통이 쉬워져요. 저희 공간이 오랫동안 마을과 함께 작업해 왔기 때문이죠. 작가는 세상과 만나면서 계속 반응하는 분들이잖아요? 권희수 작가는 재일제주인이 수집한 일제강점기 때 제작된 엽서에 관심을 두게 되면서 제주에 왔어요. 그 엽서에는 당시의 제주도 풍경이 담겨 있었는데, 작가는 엽서사진 속 장소를 직접 찾아다녔죠. 유다미 작가는 제주 태생인데, 어릴 적 기억이 전혀 없었어요. 부모님이 잠시 일 때문에 제주에 왔다가 작가를 낳은 후 바로 서울로 돌아가셨거든요. 기억에 없는 자신의 살았던 장소를 찾아가는 작업을 했어요. 이처럼 마을과의 작업을 위해 일부러 찾아오기도 하고, 지내다 보니 마을을 자연스럽게 다루게 되는 등 협업의 이유는 다양해요.

제주 4.3이 거로에 준 영향이 막대한데요. 이곳도 마을 분이 함께 힘을 합쳐 지은 집이라 들었어요.
김범진 당시 마을엔 집이 한 채도 남지 않고 전부 불타요. 거로에는 양반과 관료가 많이 살았는데 가보나 족보 등 다 불탔죠. 피난 갔다 돌아와서 마을 주민이 힘을 합쳐 다시 마을을 만들어가요. 그때 마을 분들과 함께 지어진 집이 지금의 전시 공간이에요. 오히려 제가 주목하는 건 다른 데 있어요. 마을 입구에 CU 편의점이 있는데, 거기가 옛 마을 공회당 자리였어요. 4.3 전에는 이곳에서 마을 아이와 여성들이 공부했죠. 제 외할아버지와 다른 어르신이 함께 가르치셨습니다. 이곳 역시 불탔지만 여전히 다른 곳에서 또 다른 분이 한문이나 한글을 가르치는 교육은 이어져 왔어요. 연극 등 자생적인 예술 활동으로 어려움을 이겨 내기도 했고요. 우리 공간은 이러한 활동이 이어지는 공간이라고 생각해요. 역사가 중첩되어 있는 공간인 거죠.

공간은 그때 지어진 그대로인가요?
김연주 네. 다만 지금 사무실로 쓰는 공간이 안거리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 맞은편 전시장이 안거리였어요. 또 다른 전시장으로 쓰는 뒤쪽 돌집은 옆집이었고요. 지금의 강의실 공간이 반듯하게 생겨서 오히려 전시장으로 더 적합하다고 생각하는 분도 계시겠지만, 돌집이라는 상징성과 추억이 담긴 공간이라는 장소성 때문에 오히려 전시장으로 더 의미 있다고 생각했어요. 여기 대부분 마을 주민이 조상 대대로 살아오고 있고 4.3 때 불타고 마을이 다시 지어졌기에, 집마다 많은 이야기가 있답니다. 저 강의실 옆 전시장은 저희가 운영하는 두 군데의 레지던스 공간 중 한 곳의 집주인인 할머님의 이야기가 담겨 있어요. 당신 아버님의 여동생이 살 돌집이었거든요. 집 지을 당시 여기 주변은 4.3 때 전부 불타 나무가 없어서, 20km 떨어진 한라산까지 직접 가서 나무를 해와 집을 지었다고 하셨어요.

안거리와 밖거리 사이 마당에 서 있는 침목은 뭐죠?
김연주 일제강점기 때 제주도민을 강제 동원해서 화북항에 조선소를 세워요. 해방 후 2014년까지 있었죠. 침목은 그 조선소의 흔적이에요. 배를 뭍으로 올리거나 바다로 보내기 위한 레일을 받쳤던 역할을 했죠. 관광객 유치를 위해 해안도로 조성 사업을 하면서 조선소가 없어져요. 이승수 작가가 개발에 의해 없어지는 것들, 또 거기서 생기는 문제를 고민하면서 남겨진 침목을 작품으로 만든 거죠. 다음 전시까진 이곳에 있을 예정이에요.

사무실에 있는 태엽 시계가 상당히 인상적이에요.
김범진 외할아버지가 제주도에서 초등학교 선생님이었을 때 상으로 받은 시계예요. 어머니의 기억이 녹아 있는 거죠. 시계가 흔치 않은 시절이어서, 어머니가 할머니와 자고 있으면 야밤에도 마을 분이 몇 시냐고 문을 두들겼대요. 당시 아이를 받거나 상을 치르는 게 모두 집에서 이뤄졌어요. 태어난 시각과 세상을 떠난 시각을 확인하려는 거였죠. 그래서 어머니가 태엽을 감는 게 상당히 중요한 임무였다고 했어요.

앞으로 하고 싶은 <문화공간 양>의 방향을 들려주세요.
김연주 올해 베를린에서 제주 4.3과 4.3미술을 주제로 세미나를 했어요. 그리고 내년까지 베를린에서 큐레이터 다섯 명이 <문화공간 양>의 레지던스에 참여해 한 달씩 머물면서 4.3을 연구해요. 세미나와 연구의 결과물을 베를린에서 출판할 예정이에요. 우리가 하는 이야기가 이 안에서 머무는 게 아니라 다른 지역, 다른 나라와 소통하길 바랍니다. 김지연, 이강일 작가가 설치한 ‘스트리머’도 소통을 위한 작업의 일환이죠. ‘스트리머’는 거로의 소리를 인터넷 웹사이트에 전달해요. 세계 어디서든 사람들은 웹사이트에서 실시간으로 거로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거죠. ‘거로소사’는 예술가와 함께 다양한 매체로 마을의 과거와 현재를 담아내는 작업이에요. 이렇게 기록된 작업을 다른 사람과 어떻게 공유할 수 있을지 고민하고 있어요. ‘거로기록보관소’는 그러한 고민에서 시작하게 된 아카이브 구축 작업이고요. 앞서 말씀드린 마을 분이 가진 사진이나 물건 등을 기록하는 작업은 ‘기록의 기록’이라는 이름으로 계속 진행할 거예요. 지금보다 더 다양한 분야의 작가, 즉 비평가나 기획자 등이 레지던시에 참여해 새로운 관계가 생기고, 그러한 관계 속에서 실험적인 활동이 생겨났으면 좋겠어요.

글: 강미승, 사진: 한용환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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