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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요배

풍경의 깊이, 그림의 깊이

최근 강요배에겐 연달아 두 번의 경사가 있었다. 9월에 출간한 <풍경의 깊이>라는 책이 큰 화제를 몰면서 한 달 만에 4쇄를 찍는 기염을 토했다. 지난 11월 4일에는 이인성 미술상을 수상했다. 이인성 미술상은 한국 근대미술사에 큰 업적을 남긴 대구 출신의 서양화가 이인성(1912~1950)의 작품세계를 기리고, 한국미술 발전에 이바지하고자 1999년에 대구시가 제정한 상이다. 조덕현, 공성훈, 최민화 등 굵직한 화가들이 이 상을 거쳐 갔다. 강요배는 꾸준한 회화작업으로 시대와 역사에 충실하면서도 밀도 있는 작품세계를 구현한다는 점을 인정받아 올해의 수상자가 됐다. 11월 4일이 이인성 화백의 기일이라 늘 같은 날 열리는 시상식을 다녀온 강요배 화백은 내년 같은 날 오픈해야 할 대구미술관의 개인전 준비 구상으로 바쁜 듯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터뷰에는 반갑게 응했다.  

이인성 미술상 수상을 축하드립니다.
이인성 작가가 태어난 1950년 11월 4일이라 함은, 9월 28일 서울이 수복되고 두 달정도 지난 시점이라 뒤숭숭한 시점이었죠. 인민군이 빠져나가 세상이 오리무중인 상황에서 이인성 선생이 돌아가신 겁니다. 난 1952년 4월생이니까 2년 차이가 나는 거죠, 한 세대 차이가 나는 셈입니다. 우리 아버지 세대인데, 이인성 선생은 1912년생이고, 우리 부친은 1904년생이었어요.

아버지 이야기가 나온 김에, 제주에서 태어나 그림을 시작한 이야기부터 들려주시겠어요? 출간하신 책의 <산꽃자태>라는 글에도 형에게로부터 받은 영향이 잘 묘사돼 있었는데, 직접 듣고 싶습니다.
이거 참, 형이라는 것이 뭔지. 형이랑 9살 정도 차이가 나는데, 강거배란 사람은 여러 가지 타고난 재능이 많더라고. 그래서 유명했죠. 달리기도 잘하고 그림도 잘 그리고. 동네에서 워낙 유명하니까 다들 강거배를 중심으로 호칭을 하는 거라. 아버지는 거배어른, 나는 거배아시(동생), 이렇게, 자기들 고유한 명사는 사라지고 불리는 거지. 어렸을 땐 영화잡지에서 이미지들 오려내서 스크랩해서 보면, 이게 또 화첩이 되는 거죠. 신문 잡지도 없던 시절에 이걸 보면 꼭 영화를 보는 것 같아요. 그 이미지들이 굉장히 강렬하게 오거든요. 그 이미지들을 따라 그리기도 하고, 길들여지는 거죠. 학교 다녀와서 크레파스랑 종이랑 노는 거죠. 이게 재밌으니까 또 계속 하는 거예요. 내가 뭘 만들었다는 느낌이 들어서, 벽에 딱 붙여두고 밖에 가서 놀더라도, 살짝 뛰더라도 높이 뛰는 느낌이 들고 마음이 확 밝아지더라고요. 그렇더라고요. ‘너희들은 모르는 걸 난 가지고 있다’라는 마음, 자기가 그려놓고 자기가 취해서 그랬어요. 그래서 좀 많이 그린 편이죠. 다른 친구들은 집에서 그림을 그리진 않았을 거예요. 전 정말 많이 그렸어요.

그때 당시 크레파스랑 종이는 넉넉하셨어요?
형도 그리고 하니까 특이하게도 크레파스랑 종이가 꽤 확보하고 있었어요. 심심하면 늘 그것들 가지고 놀았죠.

사실 더 놀라운 지점은 그 작품들을 어머니가 보관을 하셨다는 건데요. 유년기에 그린 작품들이 고스란히 보관돼서 2016년에 제주도립미술관에서 열렸던 회고전 <시간속을 부는 바람>에 선보였던 겁니다. 어머님은 어떤 마음으로 그 작품들을 보관하고 계셨던 걸까요?
이 말이 어떻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첫 번째로 전 그림이 가지고 있는 호소력을 봐요. 아들이 그렸더라도 개발새발 그렸으면 치우겠지만, 딱 봐도 신기하고 그냥 버릴 게 아니다라고 생각하신게 아닐까. 어머니의 정성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객관적으로 봤을 때 그림이 호소력을 가졌던 것이 아닐까 싶어요. 대부분의 어린 아이들은 그림을 그리지 않았거든요. 제 그림은 8살 때부터 완성도가 있었어요. 어렸을 때부터 하다 만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있었어요. 성의를 기울여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죠. 어설프지만 제 그림은 완성도는 있었죠. 그런 그림은 엄마라고 하더라도 함부로 버릴 수 없었던 거죠. 무관심하면 그러지 않으셨겠지만, 나름대로 그림에 메시지가 있었던 게 아닐까 싶어요.

쓰신 책에 보면 모란 그림 한 점을 형님 앞에 두셨다고 했잖아요. 그 작품이 형님이 직접 고르신거예요?
그렇죠. 아직도 형님 댁에 있죠.

그 다음에 학창시절 이야기도 들어볼까요?
형님이 나한테 늘 너그럽기도 했지만, 그만큼 내가 깡이 있기도 했어요. 그래서 함부로 못했죠. 함부로 했다가는 나도 크게 받아칠 준비가 돼 있었으니까. 강요배는 어머니 혜택받고 형님 혜택받고 그랬다는 일방적인 이야기는 안 되죠. 6살인가 7살 때 마루에서 다리를 뻗고 있으면 시원하거든요. 거기서 노래를 부르고 있었어요. 형님은 방에서 공부를 하고 계셨는데, 전 여름날에 시원하게 노래부르고 싶었던 거죠. 좀 조용하라고 한 거예요. 그건 내 자유지, 라고 받아쳤더니, 형이 나와서 뺨을 때리셨어요. 맞고 나서 정신이 없었는데, 다시 생각하니 저도 분해서 방에 들어가서 형이 보던 책을 찢어버렸어요. 그걸로 한 판이 끝났어요. 9살 차이가 나니까 형은 중학교 3학년쯤 되고, 나는 초등학교도 가기 전이니까 나이 차이가 많이 나죠. 그것이 손찌검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죠. 나중에 나이가 들어서 9년 뒤에 형이 보던 참고서를 보다 보니 내가 찢은 페이지가 나오더라고요.  

그러고 형은 공부하러 가고, 작가님도 이제 서울로 공부하러 가시느라 제주를 떠나셨죠. 서울은 어디 계셨어요?
자취하면서 어떻게 지내셨는지도 궁금하고요.
박재동 선생하고 배용균 선생하고 제가 같은 72학번이라서 같이 자취를 했죠. 저기 공릉동이라고 지금은 노원구라고 하는 곳이죠. 예전엔 과수원이었고, 학교도 그쪽에 있었어요. 4대문 안이 아닌 곳은 사실 그때 서울이라고 볼 수도 없었죠. 똥구루마 다니고, 찹쌀떡 외치고 다니던 시절이니까요. 관악산으로 옮기기 전까지 서울대는 다 흩어져 있었어요. 박재동은 부산 양아치, 배용균은 대구 양아치, 나는 제주도깡패 출신이었죠. 셋이 삼총사처럼 놀았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우리 셋이 주거니 받거니 서로 가르쳤던 것 같아요. 커리큘럼 따라갈 것도 없이 우리 마음대로 놀았죠.

학교 다닐 때는 75년 즈음해서 카뮈나 카프카, 자화상 그림을 그리곤 하셨죠. 실존주의에 심취했던 것 같아요.
무슨 주의라기보다는 그때가 히피 시대였어요. 다들 장발에 청바지에 통기타, 팝송, 비틀즈, 킹 크림즈, 레오나르도 코헨 같은 게 추앙받던 시대였죠. 그 때 우리 셋은 좀 특이했어요. 그때 우린 노자 장자를 들여다 봤었죠. 반야경 같은 거 보고요. 당대 유행을 따라가면서도 약간 다른 쪽으로 간 거죠. 그게 매력적으로 느껴졌어요. 몰려다니며 유행 따라 사는 것은 추구하지 않았죠. 좀 더 깊이 있게 생각하는 차원에서 그랬었죠.

그럼 소설가 초상을 그린 건 당시에 외국소설들을 많이 읽으셔서 나온 거였을까요? 
그건 지금 와서 할 수 있는 이야기인데요. 컨템포러리, 즉 동시대성을 약간 얕본 거죠. 디아크로닉한 것, 통시적인 관점을 취할 필요가 있다는 거죠. 그때 시각이 지금까지 일관적으로 온 거죠. 가장자리에 있으면서 다 안다고 생각하는 거죠. 비용도 안 드는 방법이거든요. 노자보다 더 멀리까지 통시적으로 놓고, 인간 보편성을 회화에서 예술에서 고민해 보는 것. 그건 지금도 유효하다고 봅니다.

그때 작업들로 제주의 대호다방에서 <각>이라는 첫 개인전을 열게 됩니다.
서문도 직접 쓰시고요. 그 때가 대학생 때였죠?
군대에서 휴가 나와서 한 달 동안 준비해서 한 전시였어요. 작은 작품 2-30점 다방에 거는 건 어려운 게 아니니까요.

반응이 어땠나요?
묘사, 재현이 중심이 되던 당시 사회에서 추상적인 것을 표현한 시도니까 참신하게 보이긴 했던 거 같아요. 신문에도 평이 실렸고요. 각은 보는 관점에 따라 다르다는 것을 말하는 거고요. 신문평이 대체로 긍정적이었던 거 같아요.

당시엔 굉장히 야심찬 청년이었겠네요. 그때 당시 전시를 할 곳은 다방밖에 없던 거죠?
그렇죠. 화랑이라는 게 없었으니까. 화가들은 으레 다방에서 대호다방에서 전시를 하고, 그게 뉴스거리가 돼서 기자들이 와서 보고 가고, 그 외엔 다들 농사짓고 그런 거죠. 99퍼센트가 문화에 관심이 없고, 시내에 한 1퍼센트 정도가 다방 중심으로 모여서 문화를 즐겼죠.

그때 작품들도 당연히 가지고 계시겠네요.
그렇죠. 어머니 때문에 다 가지고 있죠. 자기가 자기를 다 들여다보라고 하셨거든요. 좋은 거 나쁜 거 상관없이 다 가지고 있고, 다시 들여다보라고. 지금도 이사갈 때 재산목록 1호가 옛날 그림들이예요. 예전 그림박스들은 가장 먼저 챙깁니다. 나 스스로의 지킴이예요.

자료들도 늘 잘 보관해 주셔서 저희들이 연구할 때 큰 도움이 됩니다.
자료가 너무 많아서 골치 아파요. 사람이 잘난 것도 있고 못난 것도 있고 그런 것이죠. 다 좋은 것만 나올 수 있나요.

그렇게 대학 졸업하시고, 민중미술 운동을 시작하게 되는건가요. 현실과 발언 동인에 막내로 들어가시죠.
당시 정황이 어떻게 되나요?
대학졸업하고 학교 선생을 했어요. 그런데 성완경 선생이 절 찾아왔더라고요. 이런 취지의 동인이 있는 데 같이 해보자고 하셔서, 술 한 잔하다가 “합시다” 이렇게 된 거죠. 저도 원래 그런 사회운동을 하던 사람은 아니거든요. 그냥 화가일 뿐이었는데, 하게 된 거죠. 현실과 발언은 리얼리티(reality)는 무엇이며 어터런스(utterance)는 무엇인가에 대해 말해요. 현실은 무엇이고, 발언은 어떤 방식이 정확한가에 대한 것이죠. 출발점은. 현실과 발언을 어떤 방식으로 할 것인가 고민하는 거죠. ‘현실을 발언’한다는 데 많이들 초점을 맞추는 데, 사실은 현실과 발언이 어떤 것인지 토론해 보자는 것이죠. 현실을 직설적으로 표현한 것처럼 미술사학자들이 몰아붙이는 게 골치 아파요. 프로파간다니 뭐니 너무 정치적으로 해석되는 거죠. 현실과 발언이 한 십 년간 활동한 것처럼 보이는데, 실제 현실과 발언이 활동한 것은 4-5년에 불과해요. 굉장히 뛰어난 멤버들이었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그건 젊음이 지나갈 때 한때 지나가는 거더라고요. 82년이니까 29살에 들어가서, 34살에 끝났죠. 마지막엔 제가 회장을 하는데, 다들 제 말은 안 들었어요. 다들 형인데 모이지도 않고요. 85년에 민중미술협의회로 더 큰 조직으로 만들기 전인데요. 현실과 발언을 더 해보자고 호소를 했는데 잘 안되더라고요. 동인은 오래 못간다는 걸 알았죠. 슬슬 분화되더니 해체했죠. 다들 각 영역에서 잘하고 있죠. 전두환 독재 시작할 때쯤 시작해서, 전두환 독재 끝날 때쯤 해산했죠.

그 이후 행보를 들려주세요. <동백꽃 지다>가 나올 즈음이죠.
이후에 일러스트레이터로 출판사에 취직해서 한 3년, 시골에 가서 또 4.3을 그린다고 한 3년을 보냈죠. 출판사가 망한 바람에, 스스로 주제를 정해서 시작한 게 4.3을 그리는 거였어요. 그런데 너무 큰 문제라서 내 실력 가지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어요. 게다가 몸이 약해진 때여서, 곧 죽을 수도 있으니 해보자 해서 무리하게 접근한 거죠. 계획은 3년에 한 100점 정도 하려고 했죠. 이게 하다 보니 힘이 생기더라고요. 몸은 약해졌는데, 알 수 없는 대상이, 혼령들이 나를 지지하는 느낌이 들어 외롭지 않고 강해진 묘한 느낌이 들었어요. 여러 가지 미흡한 점이 있으나, 3년 만에 발표했는데, 그게 41살이었어요. 사람들이 반응이 좋았죠. 그게 본격적으로 한 첫 번째 개인전이었죠. 제주에서 한 첫 전시는 휴가 나와서 한번 해본 것에 불과하고, 본격적으로 한 첫 개인전이었죠. 처음엔 전시보다는 그림책을 내려고 한 거였죠. 그래서 동명의 책이 나옵니다. 그 전의 작업들은 모두 습작이고, 여기가 진짜 작업이 시작된 거죠. 

그리고 나서 바로 제주로 오시게 되죠? 이제야 본격적으로 제주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 같네요.
92년도 41살에 왔죠. 한 10년쯤 옮겨 다니면서 살다가 귀덕에 자리 잡았고요. 4.3이 어느 영역에서 어느 골짜기에서 일어났는지 알려면 지도를 봐야 해요. 그래서 가로 2m 정도 되는 큰 지도를 사서 김정호처럼 표시하면서 다닌 나만의 지도가 있어요. 그 지도를 가지고 자연을 한번 다시 보자 해서 10년 동안 제주 전역을 답사합니다. 오름이라는 오름을 모르는 데가 없어요. 1호는 김종철 선생이라고 있는데, 그분의 지식을 제가 다 흡수했죠. 그 다음엔 친구들이랑 다녔죠. 그러고 나니 다닐 필요가 없더라고요. 이렇고 저렇고 하는 걸 다 이해하게 됐어요. 

<고원의 달밤>이 한라산을 그린 작품으로 굉장히 유명한데 이 즈음에 하신 작업인 것 같네요.
고원에 선작지에서 보면 은하수가 잡아당기는 게 한라산이니까 그걸 실제로 좀 보고 싶어서, 특별히 양해를 구해서 학술연구 명분으로 밤에 들어가서 1시 2시에 별마다 점찍어서 스케치를 한 겁니다. 고원은 선작지왓 말하는 건데요. 새벽에 스케치를 현장에서 하고, 색은 나중에 작업실 와서 했죠. 윗세오름 앞에 선작지왓이라고 있는데, 그 곳이죠.

여기저기 다니시다가 귀덕에 자리잡으신지도 이제 20년이 되어가나요? 
그 전에는 하귀에도 있었고 외도에도 있었고, 옹포리에도 있었고요. 떠돌아다녔죠. 밖에 공부는 그만하면 좋겠다 싶었어요. 파도를 치면 어떤 형상으로 치는지, 처음 제주에 왔을 땐 잘 몰랐거든요. 처음엔 내가 제주도 출신이라고 하지만 잘 몰랐거든요. 제주의 식생이나 지질을 몰랐어요. 그때야 공부하는 범위가 내 고향인 삼양 언저리랑 제주시밖에 없었으니까요. 학교다니다보면 제주를 답사할 기회가 없잖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제주를 다 안다고 생각했었거든요. 그런데 41살에 돌아와 보니까 제주도가 이렇게 심오한가 싶어지는 거죠. 파도는 어떻게 치며 봄과 가을에 톳은 어떤 색깔을 가지며 이런 것들이요. 제가 자연과학에 취미가 있거든요. 가만히 보니 ‘자연은 너의 마음이다’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아웃에서부터 인으로, 제일 어려운 것이 너의 마음이다, 라는 결론이죠. 주관적 심상이 더 중요하다 하는 결론에 다다른 이후에는 많이 안 다녔어요. 진정 나는 뭘 하고 싶은가, 음악적으로 내 속으로 외돌개의 파도를 빌려오는 거죠. 제가 10m 넘게 치솟아 오르는 파도를 봤거든요. 제주도 자연에게 저는 허가를 받았어요. 마음대로 응용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고, 이젠 도구일 뿐이예요. 어떤 곡을 연주할 것인가만 남은 거죠. 

결국 자기 존중, 셀프 리스펙트가 중요해요. 무엇이든 땅이든 돌이든 나무든 고양이든 나무든 자기 옆에 있는 것과 따스한 관계를 갖는 것이 완벽한 우주의 중심이 되는 일입니다. 애인이면 더 좋겠죠. 따스한 관계만이 사막이든 얼음골이든 꽉 차게 만드는 것이 통시적으로 우주의 기본입니다. 천상천하유아독존이죠. 자기를 존중하는 것은 내 안에 천국이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죠. 예수도 그렇고 소크라테스부터 모든 지혜로운 이들이 하는 말이 이거예요. 너 자신을 사랑해라. 네 안에 천국이 있다. 자기를 존중해라. 가만히 있는 자리에서 이걸 수행하면 되는 겁니다. 이걸 인정받고 말고는 메가시티에서 하는 일이고요. 시장에서의 일이죠. 자기를 인정하는 건 다른 시각에 있기 때문에 사막에 있어도 가득 차는 일입니다. <어린왕자> 같은 우화에서도 하는 말이죠. 뭐하러 병들어가면서 우루루 몰려들어 도시에 있습니까. 많이 공부한 사람들이 다들 사기를 치잖아요. 그러면 뭐하러 공부를 합니까. 공부를 할수록 이기적으로 변한 사람들은 자기를 놓친 사람들이죠. 경쟁하는 삶이 아니라 맘 편히 별 보고 달 보고 천년을 생각하고 크게 들여다보고 자기를 들여다보는 위치, 그런 조건이 있다면 어디든 살만한 곳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겁니다.

본격적으로 추상이라는 개념을 말하며 관련작품들을 보여주시기 시작한 게 <상을 찾아서>전시죠.
그 전시가 중요하죠. 추상을 잘 들여다보는 게 중요하거든요. 어떤 패턴을 따라가는 게 아니라 어떤 기능을 따라가는 거죠. 어떤 결과물(양식화된 패턴)을 따라가기보단 원리적인 것을 따라갈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추상이 양식화된 개념, 아주 표피적으로 몬드리안과 칸딘스키를 두고 말하는데, 우리가 상형문자를 거론하지 않고 추상을 말할 수 없다. 마치 컬럼버스가 아메리카를 발견했다고 말하는 것처럼 말이 안 되는 것이죠. 아메리카는 진즉에 그곳에 도도하게 있었는데. 추상을 유연하게 생각하는 게 가장 중요해요. 추상을 하나의 패턴으로 이해하는 건 벽지를 하나 만든 것밖에 안돼요.

이렇게 정리된 관점에서의 최근작은 어떤 게 있을까요? 상은 다 잡으셨으니까 다음엔 무엇을 잡게 될까요?
최근엔 이 바람소리를 담고 싶어요. 회화에서 천천히 영상으로 옮겨져 가고 싶어요. 영상의 영역을 넓히고 싶거든요. 카메라를 가지고 겸손하게 오브젝트에 접근하라. 생소리를 놓치지 마라. 이런 로우한 것을 보여주려고요. 소리를 넘어서 춤을 추는 거죠. 회화-(하이픈)-댄싱이 되는 거죠. 연결돼 있는 거죠. 물리학자들도 이걸 ‘파’라고 말하죠. 이것들이 템포가 또 있어요. 시간의 정지는 무죠. 이 작품들은 내년 대구미술관에서 소개하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책 이야기도 더 들려주세요. 가장 최근엔 전시보다 책으로 유명세를 떨치고 계시죠. BTS의 RM이 좋아하는 작가이자 책이라고 소개하면서 지금 출판계에선 가장 뜨거운 책이 된 것 같은데요.
책이 그림을 따라가진 못하는 거 같아요. 문자매체가 전달하는 게 그림보다 덜해요. 그림이 더 그윽하죠. 그림은 사실 많은 사람을 원하는 게 아니예요. 첫째 자기 자신, 둘째 한 두사람. 대중매체라고 볼 수 없어요. 문자나 영상이 훨씬 대중적이죠. 그렇기 때문에 자기와의 대화예요. 그래서 그림은 누구나 하면 좋겠어요. 자기를 들여다보듯이. 내밀한, 자기가 자기를 비춰볼 수 있는, 자기를 투사해서 가능성과 실패를 체험해 볼 수 있는 그런 기능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림그리기가 지적인 것과 감성적인 것을 한 영역에 넣을 수 있어요. 시간성도 넣을 수 있고요. 내가 하느님이라고 생각해서 이 연출을 어떻게 할 건가, 이거 저지른 일을 어떻게 수습할 건가 하는 거죠. 이런 기능만으로도 굉장히 중요하다고 봐요. 진짜 자기가 저지른 것을 자기가 볼 수 있는, 거울에 비친 자기를 보는 것과는 다른 거죠.

에필로그
이후의 이야기는 자리를 옮기고서도 4시간 가량 더 이어졌다. 오후 1시에 작업실에 멍석을 깔고 막걸리 4병과 시작한 만남이 저녁 9시가 넘어서야 끝났으니 따지자면 8시간의 마라톤 인터뷰였던 셈이다. 하지만 언제나 8시간은 지루하지 않게 흐른다. 벗처럼 따스하게 대하는 마음, 어린 사람이라고 하대하지 않고 늘 존중하는 마음이 언제나 느껴지지 때문이다. 강요배가 늘 말하는 자기 존중이 곧 타인에 대한 존중이 된다. 남과 겨루지 않고, 세상 모두를 늘 벗처럼 따스히 대하는 것, 그가 지금 시골 한 켠을 벗어나지 않으면서도 가장 크게 세상의 주목을 받게 된 이유라 짐작한다. 그의 조언을 따라, 조금이나마 그를 닮아보고자, 우린 모두 그림 앞에서 꽤 오랜간 수련의 시간을 보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인터뷰 녹취를 풀다가 아주 오랜만에 그림이 그리고 싶어졌다.

인터뷰·글 이나연   사진 한용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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