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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우신

Kim Woosin

PROFILE

1955년 제주시 화북 서부락에서 출생
인천시립교향악단, 서울윈드앙상블, 아모로사 플루트앙상블의 연주자
건국대학교, 미국 뉴 캘리포니아 콘서바토리 강사
미국 글로벌심포닉밴드 음악감독
현재 한라윈드앙상블 지휘자

화북은 어머님과의 추억이 전부인 곳이에요.

전 세계 악보를 헤아리며 새벽까지 불꽃을 태우는 연정. <한라윈드앙상블>의 김우신 지휘자는 요즘 배부른 행복 속에 있다. 19년간의 서울살이, 18년의 미국행으로 인한 37년의 공백 후 다시 돌아온 화북이었다. 여기가 거기였을까. 마른 풀잎조차 낯선, 처음 보는 도시의 맛이 났다. 김우신 지휘자는 조금은 애잔하게, 그때의 그 기억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어머니란 40℃의 양감이 있는 그곳으로.

37년의 긴 외지 생활을 했는데, 화북으로 다시 돌아올 이유가 있었던 건가요?
고등학교 졸업 후 74년도에 서울에 갔어요. 미국에서 돌아온 게 2011년이었죠. 어머니가 편찮으셔서 좀 급히 왔는데, 돌아가셨어요. 제가 살던 집은 살기엔 불편해서 임대하고, 창고를 리모델링해서 2012년 9월부터 여기에서 살기 시작했어요. 지금 가족은 모두 미국에 있는데, 안 가고 있어요.

돌아온 화북의 첫인상이 남달랐을 것 같아요.
일단 길이 완전히 달라졌어요. 여기가 그 자리인가? 낯설었죠. 예전엔 말 그대로 올레(좁은 골목)길이었거든요. 버스를 타러 큰 길가로 나가는 길에, 농협도 교회도 있었어요. 집 형태도 바뀌었죠. 초가집 대신 아파트나 연립 주택이 많이 들어서서 전혀 새로운 모습이더라고요. 옛 화북의 모습은 거의 없어진 것 같아요. 그뿐인가요. 동부락과 중부락, 서부락이란 개념조차 사라졌죠. 아예 부락이란 용어를 사용하지 않으니, 생소할 수밖에요. 언어가 달라지면, 관념도 달라지니까.

그런 직관적인 모습 외 정서적인 감상은 어땠나요?
서울 생활할 때는 6개월에 한 번씩 오기도 해서 큰 변화를 못 느꼈어요. 미국에서 왔을 땐 완전히 다른 도시에 온 느낌이었어요. 예전엔 500호 정도 되는 마을 사람들을 전부 알았는데, 돌아왔을 땐 아는 분을 만나는 게 힘들었어요. 제주시에서 가장 가까운 동네니까 외지에서 많이 유입된 까닭이겠죠. ‘내가 이방인이 된 걸까?’ 낯선 사람에 의해 오히려 제가 그런 느낌을 받았어요. 동네에 친근감이 들 땐, 어김없이 아는 분을 만날 때예요. 어떤 분은 37년 만에 만나기도 했죠. 젊은 어른이었는데 할아버지나 할머니가 된 모습을 만났을 땐 추억에 잠기곤 했어요.

플루트를 전공했는데, 언제부터 음악을 시작한 건가요?
원래 초등학교 땐 수영을 했어요. 전도 수영 대회에서 50m, 100m 1등도 했었죠. 그 기록으로 제주에서 제일 알아주는 오현중∙고등학교 수영부에 특기 장학생으로 들어갔어요. 지금은 분리되지만, 당시엔 오현중∙고등학교로 통합된 학교였죠. 중학교 2학년 무렵 서울의 수영 시합에 나갔는데, 수영으로는 먹고 살지 못하겠구나 싶더라고요. 어린 생각으로도요. 제주에선 실내수영장이 없어서 부둣가에서 연습했거든요. 육지 학생은 1년 내내 연습하는데, 제겐 실기 연습 시간이 고작 6월과 7월, 2개월뿐이었죠. 수영 대회를 위해 6월엔 바닷물에 벌벌 떨며 들어갔어요. 바닷물과 달리 수영장 물에선 몸이 가라앉는 것도 문제였죠. 포기해야겠다 싶었을 때 기회가 왔어요. 그때도 오현중∙고등학교 밴드부가 전국적으로 이름을 날렸거든요. 밴드부의 정기연주회가 제주도 전체에서 유일한 라이브 콘서트이기도 했죠. 자꾸 볼 때마다 하고 싶더라고요. 친구의 제안도 있는 김에, 중학교 3학년이 되면서 음악 생활에 들어갔습니다.

플루트 연주자에서 지휘자로 전향한 건 미국에서부터였나요?
1991년부터 미국에 가기 전까지 건국대학교 출강을 했어요. 그때 오케스트라 지휘를 했죠. 사실 악기를 다룬 사람이 지휘를 잘할 수 있어요. 지휘를 받아본 연주 경력으로, 지휘할 능력이 생기는 거죠. 1993년 미국 유학을 해서 캘리포니아 주립대학 대학원(플러톤)에서 플루트를 마스터해 석사학위를 받았습니다. 그 후 2002년 창단된 글로벌심포닉밴드가 미국에서 체류하는 이유가 되었어요. 클라리넷 연주자 출신의 나민주 목사님이 창단했는데, 제가 음악 감독이 되어 한국에 오기 전까지 지휘를 했죠.

돌아온 후 다시 화북에 자리를 잡아야만 했을까요?
사실 전 미국에서 살겠다고 작정했었죠. 편찮은 어머니가 계신 화북에 왔을 뿐, 다른 도시는 고려하지 않았어요. 영주권도 있는 데다가 글로벌심포닉밴드가 기다리고 있었으니까요. 주변 정리하고 미국으로 돌아갈 채비를 2년 정도 하고 있는데, 운명이 다가왔습니다. 바로 ‘한라윈드앙상블’이에요. 참으로 매력 있는 단체입니다. 여기 음악감독님이 제 중고등학교 은사인 김승택 선생님이에요. 경영을 참 잘하셨죠. 사립 단체로서 전 세계적으로 악기 보유량이 가장 많을 정도로요. 연주회 때마다 선생님도 뵐 겸 연주도 듣고 단원도 만나기도 했어요. 아마추어인데 음악에 대한 집념과 사랑이 대단했어요. 프로도 못 할 정도죠. 프로는 음악 전공을 한다고 되는 게 아니라 그걸로 밥벌이가 되어야 하는 거예요. 내가 아마추어라면 저렇게 음악을 좋아하면서 헌신적으로 활동할 수 있을까? 난 못할 것 같더라고요. 2013년 6월경, 선생님으로부터 지휘를 권유받았어요. 제가 말했죠. “저야말로 영광입니다.” 57회 정기연주회부터 지휘를 시작했어요. 이 단체를 떠나는 건 불행이라 생각했죠.

가족과 떨어져 지내고 영주권까지 포기한다는 게 쉽지 않은 일 같은데요.
가족에겐 영 미안한 일이지만, 저로서는 최고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거예요. 게다가 이곳은 어머님과의 추억이 있어요. 미국에 산다고 결심해서 여길 정리하면 다신 돌아오지 않았겠죠. 어머님은 저기 계시는데, 떠나는 건 안 되겠다 싶었어요. 제가 영주권을 반납한 게 2015년이에요. 영주권을 따기 위해 15년이나 걸렸는데, 포기하는 건 5분이니 끝납디다. 미국대사관에서 포기한다고 하니 5분 후 오케이! 허무하긴 하더라고요. 가족은 2년에 한 번씩 오고, 매일 아침 영상 통화를 해서 곁에 있는 것 같아요. ‘한라윈드앙상블’과 어머님과의 추억, 이 두 가지가 이곳에 홀로 머무는 이유예요.

어머님과 각별한 추억이 많은 듯한데, 어떤 분이셨나요?
어머님은 참 힘들게 인생을 사신 분이에요. 조실부모하고 남편까지 일찍 여의었죠. 외삼촌은 밀항해서 일본에 거주했고요. 제 누님도 일곱 살이 될 무렵, 세상을 떠났어요. 유일한 혈육이 저 하나뿐이었습니다. 어머님 특유의 보호 본능이 강했어요. 자고 있는데 새벽 2~3시쯤 제 이름을 부르면서 방에 뛰어 들은 적이 있어요. 악몽을 꾸신 건지, 제 얼굴을 만지고 나서야 안심하고 주무셨죠. 수영하던 중학교 2학년 때, 무슨 생각이었는지 선배와 놀다가 외박한 경험이 떠올라요. 다음날 등교하니, 학교가 발칵 뒤집혔죠. 어머님이 교무실에서 아들 찾아내라고 난리가 난 거예요. 마을에서도 아마 다 기억할 거예요. 아들 하나만을 위한 인생을 산 어머님이란 것을.

어머님은 어디가 편찮으셨던 거죠?
치매에 걸리셨어요. 제주대학병원에서 외로움 때문이라 하더라고요. 어머님은 저를 위해 평생 힘들게 사셨는데, 저는 37년간 어머님을 거의 ‘방치’한 거예요. 전 저를 위해서만 산 거죠. 제가 미국에 있을 땐 화북초등학교 동창들이 어머님을 모셨어요. 친구들 넷이서 병원 진찰실에 쭉 둘러서 있었대요. 의사 선생님이 “아이고, 아들이 다 올 정도로 어머님 참 잘 사셨습니다.”라고 하면 어머님은 시치미 뚝 떼고 “네. 다 우리 자식입니다.”라고 답하셨답니다. 병원 다녀오면 갖은 좋은 고기도 어머님께 대접하고∙∙∙ 친구들의 은혜는 평생 잊을 수 없어요.

생계를 어떻게 유지하셨을지 궁금해요.
그야말로 집도, 절도 없었죠. 그나마 가족같이 지내던 분이 농가 주택의 밖그레에 와서 살라고 했어요. 초등학교 2~3학년경 구멍가게를 했어요. 풀빵 장사도 하고 온갖 잡화들도 팔았죠. 겨울에도 평상에서 잤어요. 우리 어머님이 화북에서 처음으로 새벽시장을 열었어요. 새벽 4시에 일어나 두부나 콩나물 등을 담은 리어카를 끌고 바닷가 공터에 쭈그리고 앉아 파셨죠. 부지런히 하다 보니, 시장이 형성될 정도였죠. 그렇게 억척같이 하다 보니, 밖그레 맞은편 땅을 사서 어머님이 돌아가신 그곳에 집을 지었어요. 이후 가축도 키우고 팔아서 하숙비도 꼼꼼히 챙겨 보내셨죠. 주변에선 재가하란 권유도 받고, 일본에 계신 외삼촌이 고생 그만하고 건너오라는 이야기도 했대요. 자식 하나 때문에 평생을 바친 거죠. 이 아들은 지켜야 한다는 일념 하나였어요.

지금 그 자리엔 뭐가 있나요?
예전 서부락이라고 불리던 곳에 있는데, 그 자리 그대로 있어요. 풀빵 장사한 맞은편에 산 집에는 간판도 붙였어요. ‘도라지 상회’입니다. 어머님 존함이 백일정인데, 마을 사람들은 백일순이라 불렀어요. 백도라지 상회인 거죠. 37년의 공백 때문에 마을 사람들이 절 못 알아보면 “도라지 상회 아들입니다.”라고 소개하죠. 화북 사람들에게 도라지 상회는 알아줬어요. 당시 구멍가게에 간판도 없던 시절인데, 지금으로 말하면 우리 어머님은 거상이 될 자질이 있었던 거죠. 그때 마을에선 제가 유일하게 서울로 대학 진학을 했는데, 원래 주변에선 그걸 말리는 분위기였어요. 어머님이 어떻게 감당하냐면서요. 집안 사정 때문에 대학을 꿈꾸지 못하고 일터로 빠지곤 했던 시절이었죠. 우리 어머님은 기꺼이 지원해 주셨어요. 합격했을 땐 전화도 없어 동사무소에서 마이크로 김우신의 합격을 방송했어요.

지난 2015년경 ‘동네오케스트라 화북’의 지휘도 맡으셨죠?
‘동네오케스트라’는 화북 초등학교 운영위원장으로 있던 김영환 단장의 철학으로 탄생했어요. 제주도에 관광산업이 중요한데, 들을 거리가 없다는 걸 문제 삼았죠. 동네마다 오케스트라가 생겨서 어느 지역에 가도 음악이 흘러나와 어린이도 어른도 함께할 수 있는 제주 전역의 오케스트라를 꿈꿨어요. 토요일마다 화북초 관악부를 대상으로 5~6명 모인 것이 지금은 70여 명으로 불었어요. 김영환 단장의 전공이 전기 계통인데, 음악에 애착을 가지고 청소년에게 교육적으로 좋은 정서를 불어넣을 수 있다는 취지가 확고했습니다. 제가 지휘자로 있다가 ‘한라윈드앙상블’과 함께하니 집중이 안 되어 다른 좋은 지휘자에게 자리를 양보했어요.

‘한라윈드앙상블’의 역사가 벌써 26년째예요. 혹 마음에 품은 연주회 계획이 있는지요?
일단 ‘한라윈드앙상블’의 정기연주회가 1년에 10여 회 있어요. 일본과의 교류 연주회도 2022년까지 계약되어 있죠. 이와 별개로 야외 연주도 하고 싶어요. LA 헐리웃볼 같은 야외 상설 연주장이 있으면 하죠. 바람 때문에 제약이 있겠지만, 여름 시즌엔 할 수 있을 듯해요. 오후 5시쯤 소풍 가듯 연주장에 와서 오후 7시쯤 <한라윈드앙상블>의 연주를 즐기기 시작하는 거죠. 땅도 매입하고 건축을 해야 하니, 도에서 도와주면 좋겠어요. 그야말로 들을 거리가 있는 국제적 관광도시로 발돋움하는 거죠. 훌륭한 연주자도 제주에 유치해서 <한라윈드앙상블> 야외 콘서트가 명성을 날리면, 이 때문에 제주에 오겠죠. 될 거예요.

지금 화북에서의 삶을 음악으로 떠올려 본다면요?
멘델스존의 ‘핑갈의 동굴’이 떠오릅니다. 스코틀랜드의 헤브리디즈 군도 스태퍼 섬에 있는 동굴을 배경으로 썼어요. 멀리서 파도가 밀려오는 게 들리죠. 파도가 와서 바위에 착 부딪히는 그 상상은 제주도를 떠오르게 해요. 가끔 제주도다운 곡이 나와야 한다는 생각을 합니다. 아, 가곡은 있어요. 혹 <떠나가는 배>를 들어봤나요? 6.25 전쟁 때 제주로 피난 와서 교편을 잡던 변훈이 제주 출신 시인 양중해와 만나 작곡한 가곡이죠. 성악가가 가장 즐겨 부르는 노래 중 하나예요. 테너 엄정행의 목소리로 들어보세요. 시원합니다.

어머님과의 추억도 언젠가 음악으로 표현할 수 있겠죠?
안 그래도 어머님의 삶과 저와의 관계를 음악으로 작곡해보란 제안을 들은 적이 있어요. 어머님이 떠나고 나서야 잘 모시지 못한 걸 후회해봤자 부질없는 일이겠죠. 최소한 지금 곁에 남아 있는 걸 도리로 생각해요. 지금은 곡 만들 능력이 안 됩니다만, 다른 기회가 있겠죠. 나만이 들을 수 있는 가곡 형태. 해보고 싶은 욕심이 납니다.

글: 강미승, 사진: 한용환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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