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LACE

양영선

Yang youngsun

PROFILE

1950년 제주 화북 거로마을에서 출생
제주중앙여자고등학교∙서귀포중학교 교감
표선고등학교∙서귀포여자고등학교 교장
제주교육과학연구원 원장
현재 역학상담사, 작명사 및 거로마을회 운영위원 등

거로마을의 힘은 역시 사람입니다.

‘영원한 것은 없다.’를 신조로 삼는 양영선 전 교장에게도 엄지척을 아끼지 않는 게 있다. 세상에 눈을 뜬 순간부터 그의 일희일비를 함께해온 거로마을이다. 38여 년 교직생활을 은퇴한 후 그는 묵혀온 자신의 과제를 차근차근 풀어나가기로 했다. 그 결과물인 <거로∙부록마을지>는 마을의 참된 그릇이자 미래로 연결되는 희망이다. 불멸의 거로마을, 이 의심 없는 흐름에는 사람이 버티고 있었다.

올해 8월에 편찬한 <거로∙부록마을지>를 보았어요. 마을지를 쓴다는 게 만만치 않은 작업이었죠?
3년 반 걸렸어요. 원래 책의 시초가 있었어요. 1990년 화북동 운영위원회에서 <화북동향토지>를 만들자는 움직임이 있었죠. 제주도교육위원회 의장이던 제주대학교 백자훈 교수가 맡아 1년 후에 초안이 나왔어요. 400자 원고지에 손으로 쓸 때이니, 복사한 초안을 거로마을 원로들이 봤죠. 그런데 거로에 대해선 하나도 없는 거야. 제주 4.3 사건 때 여기 남겨진 자료가 다 불타긴 했어요. 화가 난 원로들이 우리 자체로 써야겠다고 집필자를 찾아 나섰죠. 마을 출신의 교수 두 명에게 요청해도 거절당하자 제게 청이 왔어요. 하긴 마을지 쓴다는 게 상당히 부담되는 일이지. 잘못하면 욕먹기 딱 알맞거든. 잘해 봤자 본전이었죠. 당시 제 나이가 마흔 한살, 제주여자상업고등학교 교사로 재직하던 시절이에요. 마을 책임자가 저보다 10살 나이 많은 마을의 형이었는데, 원로들 회의 결과로 저를 지목했다 했어요. 처음엔 어림없다고 거절했지. 이 분, 참 끈기 있었어요. 그다음 날에도 왔죠.

이거 거의 삼고초려 감인데요?
돌려보냈는데도, 세 번이나 찾아왔어요. 책임자 말이 지금 원로들 살아있을 때 기록하지 않으면 영원히 거로에 대한 기록은 없어질 거라 했죠. 속으론 동의하면서도 5일간 생각해보겠다 했어요. 마을지 잘못 쓰면 여길 떠나야 할 판국이야. 사실 시내에 살고 싶었는데, 할머니와 어머니가 여기 계셔서 못 떠나고 있었거든요. 종손에게 상의하니, 나밖에 쓸 사람이 없다고 말하는 통에 승낙했죠. 잘못되면 마을 떠나지 뭐, 그런 심정이었어요.

자료도 소실됐는데, 작업은 어떻게 진행한 건가요?
일단 백자훈 교수와 화북동 운영위원장, 마을 책임자까지 넷이서 만났어요. 그때 합의된 게 백 교수가 쓴 건제1편 화북에 들어가고 제2편 거로∙부록과 제3편 황사평을 나눠 새로 쓰자고 했죠. 당시 7월 말이었는데, 12월 발간을 목표로 두었죠. 시간 여유가 3개월 정도밖에 없던 거야. 제2편은 제가 어떻게든 써오겠다고 했어요. 그동안 산소를 누비면서 비석을 찾고 동네 사람들에게 족보를 다 가지고 오라고 했죠. 밤낮없이 찾고 쓰다 보니, 90페이지 정도 되어서 체면은 치렀어요. 이런 상황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은 빈약하다고 말한 경우도 있었지만, 집필 과정을 잘 아는 마을 원로들 사이에선 인정받았어요.

어떤 점에서 인정받은 건가요?
마을에선 다들 자기 조상만 봐요.(웃음) 자기 조상의 내용 중 하나라도 빠지면 지적하기 마련이죠. 그걸 착안해서 집마다 돌아다니며 자료도 모으고 이야기를 들은 뒤 부가적인 자료를 찾아 넣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우당도서관의 제주도 관련 자료가 큰 힘이 되었죠. 자손들이 모르는 내용을 보충했더니, 성의를 갖고 썼다고 인정했습니다. 10년만 더 빨랐어도 마을의 역사를 잘 아는 노인들이 많았을 텐데, 이걸 쓸 생각을 미리 하지 못해 아쉬웠어요. 이때 퇴직하면 제대로 한 번 써봐야지 마음먹었죠.

<거로∙부록마을지>는 말하자면 퇴직의 유작이네요.
2016년 1월경, 4년 후면 칠순인데 뭘 해 볼까 생각하던 중 이게 떠올랐어요. 2018년 말까지 써서 2019년에 검토해 자비로 1천 권을 발간하려고 했죠. 그런데 10개월 정도 쓰다 보니까 딱 막히는 거야. 사람들에게 물어도 안 나오고, 사람들은 제게 뭘 알려줘야 할지 모르는 상황이었죠. 그래서 이 책의 마중물 격인 <거로에서 살다>를 먼저 발간했어요. 이걸 마을관계자와 주변 사람들에게 돌리니, 이런저런 반응이 들어왔죠. 빠진 부분이 있다고 하면 직접 만나기도 하면서, 점점 스토리를 붙였어요. 심도 있게 자료도 더 찾고, 사진도 보충했습니다. 각 집안의 족보를 여러 번 공부해서 훌륭한 사람을 기억해두고, 관보와 연계 지어 인물을 뽑아냈죠. 이번엔 제 자비가 아닌 행정기관의 지원금과 거로마을회 기금으로 발간하게 되었어요. 지난 추석 땐 마을 운동장에서 출판기념회도 했죠.

집필하면서 거로에 대한 자부심도 자연스레 생겼을 텐데요.
1800년대부터 100년간 제주목에서 제일 인재가 많은 동네가 거로였어요. 제주성에서 가까워서 1700년대 중반 이후로 전직 관료들이 많이 입향해 살았죠. 1814년에 이재수 어사가 인재를 뽑을 땐, 4명 중 거로 출신인 김영집과 김영업, 김영락 삼 형제가 꼈어요. 한 집안에서 셋이나 나오니까 나라에서 1명을 포기하라 해서 부친이 막내를 기권시키긴 했지만요. 이후 함덕에서 부친이 거로에 데려와 공부시킨 한석윤이 19세에 문과전시를 급제했어요. 거로에 이사 와서 공부해 자꾸 떨어지던 성균관 진사과에서 1등한 박승규도 거로의 이름을 더욱 날렸죠. 지금으로는 제주도의회 의장 격인 유향좌수도 23명이나 배출했어요. 유향좌수는 가문의 영광으로 통했습니다. 또한 제주목관아, 향청, 향교에서 행사가 있을 때면, 다른 마을에서 2~3명만 와도 거로 출신들은 30~40명 떼로 몰려갔어요. 남자가 밭 가는 일 말곤 할 게 없으니까 한가했죠. 책이나 읽고 향교나 열심히 다녔으니까. ‘제1거로’의 위상만큼은 조선 후기부터 일제강점기가 되기 전까지 변함없었어요. 거로의 한자도 큰 길이 많아 생긴 거로(巨路)에서 훌륭한 인물이 많다는 지금의 거로(巨老)가 된 이유였죠.

지금 거주하는 거로에서 태어나신 거죠?
전 가장 불행할 때 태어났어요. 제주 4.3 사건 이전에는, 거로의 하동에는 마을이 없었어요. 윗동네에만 150가구 정도 살고, 부록마을(거로마을의 동남쪽)에 한 30가구가 있었죠. 연북로 남쪽, 황사평과 부록 사이에 있는 큰터밭이라고 없어진 마을이 있었어요. 1948년 11월 하순에 계엄령이 선포되니까 철거하라고 해서 다 준비하고 거로마을에 내려와 사는데, 1949년 1월 7일 오전 10시에 이곳도 방어를 못하니 당일 오후 6시까지 지금 제주동국민학교로 집합하라고 명이 떨어졌어요. 밤에 다 불사 지른다는 거였죠. 경찰과 군인들이 횃불 들고 다니면서 초가집 자리에 탁탁 불을 지폈죠. 3일 후 해산하려고 보니까, 제주성은 미리 피난 간 사람들 차지였어요. 그때 갈 곳이 없어 화북1리 마을에 마구간이든 헛간이든 들어가 5개월을 살았죠. 이후 거로마을복구추진위원회가 조직됐어요. 지금 거로마을 하동의 밭이었던 1만평의 땅에 성축을 쌓아 임시로 살았죠. 낮엔 농사짓고, 밤엔 방어하면서요. 부록마을과 큰터밭마을에 살았던 주민 대부분 분양을 받기도 했지만, 원래 거로에 살았던 주민들은 일부만 분양 받았어요. 못 받은 사람은 담 옆에 기둥을 몇 개 세워 임시 초막을 만들어 살았어요. 나도 남의 담 옆에서 태어났고요.

당시 가족들이 모두 제주에 있었던 건가요?
아버지는 제주를 떠났다가 다시 돌아온 경우였어요. 배포가 참 큰 분이었는데, 1942년에 결혼해서 1943년 징용 대상이 되었죠. 일본 광도조선소에서 배를 만들다가 미국 폭격 공세가 시작되자 바다에 뛰어들어 탈출했어요. 일본에 친지가 많으니, 해방될 때까지 공장에 숨어 살았죠. 해방된 후 고향으로 돌아왔고, 저의 누나를 낳았어요. 제주 4.3사건이 가족에 미친 영향이 참 큽니다. 이 때문에 아버지는 일본으로 밀항을 시도하다가 짐작 상 밀고로 송환되어 서울에 몸을 숨겨요. 우리 할아버지는 1948년 12월에 마을을 방어하다가 무장대의 습격에 돌아가셨고, 할머니와 어머니, 어린 숙부, 누나만 남아서 피난살이를 하고 있었죠. 이 소식을 들은 아버지가 안 내려올 수 있었겠어요? 1949년 여름에 내려왔고, 저도 그다음 해 태어났습니다. 우스갯소리지만, 아버지는 죽을 고비를 한 번 넘기면 자식을 한 명씩 낳았어요.(웃음) 이후 나이가 많아서 영장이 안 나올 줄 알았는데 1950년 8월 29일에 입대하여 6.25 전쟁에 참전하셨죠. 그 후 1954년 6월 1일에 제대하여 고향으로 돌아왔고, 그다음 해 누이동생이 태어났어요.

지금까지 거로에 거주하는 이유가 있었는지요? 교편도 서귀포까지 여러 군데에서 잡으셨잖아요.
아버지가 초등학교 3학년 때 돌아가셨어요. 아마 살아 계셨으면 저도 시내로 나가서 살았을 거예요. 아이들도 크니까 학교에 다니기도 불편했고요. 그런데 의리상 할머니와 어머니만 두고 갈 수가 없더라고. 지금 사는 이 집이 11년이 되었는데, 아파트 한 채 값으로 지은 거예요. 어머니가 이사는 안한다고 해서 제일 좋은 기와집에서 살다가 가시라는 마음에서였죠. 집에서 가까워서 제주여자상업고등학교에는 3번 부임해 13년 근무했고, 함덕고등학교에는 2번 부임해 7년 근무했어요. 대정고, 애월고, 표선고 등 교통은 크게 문제 되지 않았어요.

교사에 대한 꿈은 언제 품으신 건가요?
사실 가장 자신 없는 직업이 교사였어요. 결혼도 늦게 한 게 다른 직업을 찾아보려고 해서였죠. 그러다가 어느 날 이왕이면 최고의 선생이 되자는 결심이 섰어요. 교육법과 승진 규정을 살펴봤는데 뭐 까짓것 할 수 있겠더라고. 결국, 교육감 빼고는 교감과 교장을 거쳐 최종 연구원장까지 역임했으니 성공한 셈이죠. 표선고등학교 교장 시절엔 학교를 일반고등학교로 바꿨어요. 2009년 기존 상업계가 일반계로 된 후 3~4년이 지나니 명문대생도 나오고, 올해엔 서울대 합격자도 생겼죠. 서귀포여자고등학교 교장으로 재직할 땐, 자율형 공립고가 생길 무렵이었어요. 5년간 10억원을 지원하는 이 프로젝트에, 직접 계획서를 써서 따냈죠. 나름 보람된 일들이 많았어요.

거로의 산증인인 셈인데, 어떤 변화를 느끼시나요?
제주 4.3 사건 전에는 마을의 단결력이 좋고 마을을 위한 희생 봉사도 서슴지 않았어요. 그 사건 후에는 마을이 소위 말해 쑥대밭이 되었죠. 집이 타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어요. 무고하게 죽는 사람이 많았고, 혹한과 굶주림에 시달려야 했죠. 점점 마을 중심이라기보다 개인주의 성향을 지니게 됐어요. ‘다 같이 살자.’에서 다 같이 못 사니까 ‘나만이라도 어떻게든 살자.’란 풍조가 생긴 거예요.

근처 화북공업단지가 생기는 변화 속에, 마을의 반응도 남달랐을 텐데요.
시작 당시에는 거기가 농사도 안되는 땅이니까 동네사람들 취업도 하고 좋을 거로 생각했죠. 미래를 알면 못살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연탄 공장부터 생겨서 면적을 많이 차지했고, 점점 불어나서 애초 공업지구 범위 바깥까지 공장이 많이 생겨났어요. 연삼로 북쪽과 공업지구 사이인 거로도 공업유통지구로 예정되어 있었어요. 2000년대엔 마을 중심에 공업지구가 있게 될 운명이었죠. 대책위원회를 구성해 진정서도 넣고 데모를 해서 1991년이 되어서야 그 계획이 취소됐어요.

거로의 생명은 여전히 계속되겠죠?
제가 역학을 공부해서 영원이란 건 없다는 걸 알아요. 100년간 ‘제1거로’란 말을 들은 것만으로도 아주 훌륭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죠. 150가구의 마을에서 제주목을 100년간 주름잡았으니까. 최근에도 빼어난 업적이 이어져요. 4형제가 전부 서울대학교를 졸업해서 박사가 된, 전국적으로 보기 드문 경우도 있었죠. 거로 출신으로 서울시립대학교 교수인 현창택은 세계 3대 인명사전에 전부 2~4회씩 등재되기도 했어요. 건설사업관리와 가치공학(Value Engineering) 분야에 공로한 점을 인정받았죠. 역시 거로의 힘은 사람이 아닐까 해요. 사람이 있는 한 계속 되겠죠.

글: 강미승, 사진: 한용환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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