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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LACE

제주벤딩

jeju bending

PROFILE

이신열 대표

움직이는 동안은 기계와 같이 늙어가 볼까 해요.

어려운 시절을 벤딩 일로 이겨냈다. 기술자라고 말하지 못했던 40대의 부끄러움은 옛날 말이 되었다. 지금 그녀는 당당한 여성 사장이자 훌륭한 기술자다. 친구처럼 식구처럼 지내는 주변 사람들의 도움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힘들었던 만큼 힘든 이의 마음을 알기에 이제는 주는 것이 더 행복한 사람이 되었다.

화북공업지역에는 어떻게 오게 되셨어요?
원래 시민회관 쪽에서 공장을 했어요. 그런데 시내에서는 소리가 나서 공장을 못 하게 했어요. 주변에서 도청이나 시청에 진정을 넣기도 했어요. 또 이 일을 하는 사람은 당시 공업지역을 오고 싶은 곳 1순위로 생각했어요.

화북공역지역에 처음 오셨을 때 어떠셨어요.
처음 왔을 때는 살 곳도 없어서 공장 3층에서 살았어요. 요즘이나 이렇게 훤하지, 가로등이 드문드문 하나씩만 있으니까 껌껌해서 밖에 나갈 수가 없었어요. 그 당시는 아이들이 어려서 무서워했어요. 그나마 밤 10시까지는 밝았어요. 옛날에는 일이 많아 밤 10시 이상까지 일했거든요. 그렇게 일했는데 그때는 왜 그렇게 돈을 못 벌었는지 이해가 안 돼요. 당시 제 소원은 월말에 직원들 월급 주는 거였어요. 그것이 최고의 기쁨이었어요. 지금에야 기계시설이 있으니까 직원은 한두 명이면 돼요. 그런데 옛날에는 모두 사람의 힘으로 해야 하니까 웬만한 공장에는 직원이 열 명, 스무 명이 기본이었어요. 우리 같은 경우도 20명, 30명까지 있었어요. 직원들 밥해 먹이자면 밥하는 아줌마도 따로 있어야 했어요.

공업지역 안에 공장은 많아졌어도 사람 수는 줄었을 수도 있겠어요.
그렇죠. 그런데 그때는 인건비가 적어도 사람 수가 많아서 직원 월급 주기가 힘들었어요. 또 옛날에는 직원들을 먹여 주고 재워 줬어요. 총각 직원이 일 끝내고 다섯 시쯤 가면 저녁 도시락까지 싸 줬어요. 그건 어쩔 수 없었어요. 아는 사람이 아니라도 직원이고 일을 배우겠다고 왔으니까요. 지금은 못할 것 같아요. 지금 생각하면 저 자신이 참 대단해요. 어떻게 그렇게 해 줬는지 몰라요. 저녁에 도시락 싸놓고 다음 날 오전 열 시쯤 출근해서 일했어요.

밴딩 일은 언제부터 하셨어요?
20년쯤 됐어요. 우리가 제주도에 처음으로 육지에서 벤딩 기계를 가져왔어요. 벤딩 기계가 제주도에는 없었는데 서울 무역센터에 가 봤더니 벤딩 기계라는 것이 있었어요. 그 당시 절곡기는 많이 있어도 벤딩기는 없었거든요. 그때 벤딩 기계를 가져왔어요. 그때는 벤딩이라는 걸 주위 사람도 잘 몰랐어요.

처음부터 제주벤딩을 혼자 운영하셨나요?
남편과 함께 이전 공장을 처음 시작할 때는 이것저것 잘할 것 같았는데 맘대로 안 됐어요. 한 10년 하고 어쩔 수 없이 공장을 정리했는데, 그중에서 애착이 가는 벤딩을 제가 직접 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작은 규모로 제주벤딩을 시작했어요. 보통 남자들은 큰 것만 쫓아가고 ‘작은 일은 될까’라고 의심합니다. 그런데 살아 보니 한푼 두푼 모아야 빌린 돈도 갚지 큰 것만 쫓아가면 망하는 경우가 더 많아요. 저는 그냥 차곡차곡 한 길만 보고 일하다 보니 주위에서 많이 도와주셨어요. 우리가 부도나면서 빌린 돈이 좀 있었어요. 그때 신랑도 저도 다 신용불량자가 됐어요. 이것저것 해야지 해도 남편 하는 일을 쫓아가지도 못할뿐더러 남자는 일을 벌이고 여자는 뒷수습해야 하는 것이 너무 힘들어서 ‘나는 이제 따로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많이 힘드셨겠어요.
부도 당시에는 못 살 것 같았어요. 곧 죽을 것만 같았어요. 벤딩이 나를 살렸어요. 이 일이 있어서 제가 힘을 낼 수 있었어요. 일하면서 조금씩 빌린 돈도 갚고 아이들 대학까지 보냈어요. 아이들도 이제는 다 커서 결혼했어요.

당시 공장이 어려워진 특별한 이유가 있었나요?
그때는 공업지역의 공장 값이 비싸서 다들 오기 힘들었죠. 우리는 돈을 빌려서 왔는데, 외환위기 때라 수금을 못 했어요. 지금은 외상이 없는데 옛날에는 60~70%가 외상이었어요. 아는 분 그러니까 삼촌, 팔촌, 사돈의 누구, 누구, 누구를 두세 번만 걸치면 다 외상으로 거래했어요. 육지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일을 맡기지만, 여기서는 연 없으면 장사를 못 한다고 할 정도였어요. 문제는 말일에 수금하기가 너무 힘들어서 수금하는 직원도 데리고 나왔어요.

옛날에는 외상이 있었군요.
또 계약금을 10%도 안 줘도 그냥 일을 시작했어요. 지금은 어디든 계약금이 없으면 일을 안 해요. 그러나 처음에는 몰라서 일 맡기면 그냥 일을 준 것만도 고마워서 계약금 없어도 일을 했어요. 만약 벤딩해 준 비용으로 5만 원 정도 받게 된다면 15만 원, 20만 원짜리 자재를 저희가 먼저 사와야 했어요. 문제는 벤딩을 다 해 놓아도 계획이 변경됐을 경우에는 찾아가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자재를 사지 않고 손님이 자재를 직접 갖다 줘야 일을 합니다.

제주벤딩을 혼자 운영하면서 어려운 점은 없으셨어요?
주위 분들이 너무 좋아서 다 도움을 주세요. 일을 하다 보면 어떤 때는 기계가 고장 나기도 하는데 주위에서 다 도와주세요. 그래서 혼자 이렇게 일해도 나 혼자가 아니에요. 공업단지의 주위 분들이 너무 좋아요. 그래서 다른 동네 사람이 와서 볼 때는 공업단지가 뭐가 좋으냐고 할 수 있어도 진짜 살기 좋습니다. 주위 분들이 좋으니까요. 다만 이 공장을 운영하면서 몸은 생각 않고 일만 하다 보니 아픈 데가 많아요. 어깨가 너무 아팠지만 일 년 정도 방치했어요. 나중에 봤더니 심줄이 다 끊어졌어요. 낮에 돌아다닐 때는 아파도 그냥 참을 수 있겠는데 밤에 누우면 잠을 못 잤어요. 2년 전 부산에 가서 어깨를 수술했어요. 혼자 무거운 걸 들다 보니 어깨가 다 빠져 내린 거예요.

특히 도움을 주신 분이 계신가요?
지금은 그런 일 없지만 처음에는 돈이 부족하니까 공장 임차료 내는 것도 며칠씩 늦어지곤 했습니다. 그런데 사장님이 무척 좋으세요. 거로마을에 사시는데 이제는 80세가 넘으셨습니다. 사장님은 저를 보면 항상 아주머니가 대단하다고 하시며 칭찬을 많이 해 주세요. 그러면서 임차료 드릴 때 약 지어 먹으라고 20만 원씩 주셨어요. 제가 안 받는다고 해도 꼭 주셨어요. 집세를 늦게 주는 것도 미안한데 말이에요. 처음 왔을 때는 젊은 아주머니가 이런 일을 다 한다며 오죽했으면 이렇게 하겠냐고 우리 신랑한테 막 꾸중하셨어요. 공장을 빌리러 이리 저리 다닐 때 찾아온 이곳은 빈 터였어요. 자갈이 많았는데 사장님이 잠깐 있어 보라고 하더니 싹 메워 주시길래 공장 지어 들어왔어요. 오고 나서도 사장님의 배려는 말도 못 해요. 옆집에서 무슨 일 있다고 해도 걱정해 주곤 하십니다. 그래서 공업단지 와서 저의 은인 1순위가 사장님이고 그 다음은 주위에 공장하시는 사장님들이에요. 친구처럼, 한식구처럼 지냅니다. 저에게 인덕이 있는 것 같아요.

여자라는 이유로 공장을 운영하실 때 힘든 일은 없었나요?
“여자분이 합니까?”, “아저씨는 뭐합니까?” 하고 물으면 대답하기 곤란해요. 이건 십 원짜리 장사라 남자가 하기는 좀 그렇습니다. 하나 가지고 오면 만 원, 두 개 가지고 오면 오천 원, 이런 식으로 장사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처음에는 힘들었죠. 손님들이 오면 기사만 찾으니까요. 그때는 부끄러워서 제가 기사라는 말을 못 했어요. 손님이 오면 먼저 주문받고 기사가 와서 할 거니까 1시간 후에 오라고 한 뒤 보냈어요. 손님이 가면 그때부터 일을 했어요. 손님이 돌아오면 우리 기사가 해 놓고 갔다고 했어요. 초창기에는 어려서, 그때가 40대 초반이었으니까 부끄러웠어요.

요즘에도 부끄러우세요?
이제는 처음 오시는 분이 “기사님 어디 가셨어요?” 하고 물어보면 “제가 기사입니다” 해요. 그런데 요즘도 “아주머니 말고 기사님이요” 하면서 남자 기사를 찾아요. 제가 기사라고 하면 정말 할 수 있냐고 몇 번을 물어요. 과거에 들었던 말과 똑같은 말인데도 지금은 부끄러워하지 않고 당당하게 얘기해요. 지금 급해서 오셨으니까 제가 해 드린다고 해요. 손님이 안 될 것 같다고 하면 아니 기사가 된다고 하는데 왜 안 된다고 하느냐고 잠깐만 기다리시라 하고 제가 일을 해 드려요. 그러면 대단하다고 하시죠. 그때는 진짜 기분이 말도 못 하게 좋아요.

정말 대단하세요.
건축 크게 하시는 분도 벤딩을 잘 모르는 분이 있어요. 그래서 저에게 계산을 어떻게 하는지 등 조언을 구하기도 하는데, 그럴 때도 아주 기분이 좋아요. 벤딩은 숫자 하나만 잘못 되면 원하는 모양이 안 나와요. 우리는 많이 배우지는 못했지만 전문가, 인테리어 실장님들이 와서 저에게 수학대학 나왔냐고 농담을 하세요.

보람이 있으시겠어요.
네. 일하는 데서 보람을 느끼고 있어요. 예전에는 신랑이 생활비를 많이 못 주니까 제가 이렇게 힘들게 산다고 생각했어요. 지금 생각해 보니 일하면서 제가 사는 맛을 알게 됐어요. 우스갯소리지만 죽어서 ‘너는 뭐 하다 왔냐’고 물으면 저는 당당하게 ‘일 열심히 하다 왔습니다’ 하고 얘기할 수 있어요. 사는 재미가 나쁘지는 않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벤딩 일 하기를 잘했다고 생각합니다. ‘나도 이렇게 필요한 사람이구나! 원하는 곳이 있구나!’ 하고 생각해요. 이 일을 하면서 얻은 대단한 자부심인 거죠. 이 일은 힘들지만 마음은 편안하고 여자이지만 뿌듯해요. 작은 일이지만 제가 필요하다는 사람이 있어서요. 움직이는 동안은 기계와 같이 늙어가 볼까 해요. 기계가 늙을 때까지요.

오래 일을 하셔서 손님과 관계도 특별할 것 같아요.
계속 오시는 분들은 이제 친구 같죠. 오셔서 힘든 얘기도 하세요. 일요일이나 토요일 같은 때도 전화해요. 제가 바쁜 일 있어서 안 되겠다 해도 그분은 필요하기 때문에 벤딩 하나 해 달라고 하세요. 벤딩을 해 가야 거기에 끼워서 일을 끝낼 수 있거든요. 벤딩은 똑같이 많이 해서 옆집에 줄 수 있는 것이 절대로 아니기 때문에 꼭 필요한 사람만 와요. 그때그때 필요하면 와요. 그래서 저녁 늦게, 토요일, 일요일, 쉬는 날에도 해 달라고 하면 공장 와서 해 드려요. 작년인가 한 200개 주문받았어요. 그런데 주문한 사장님의 실수로 중간에 몇 개를 잘못 벤딩했어요. 사장이 와서 머리만 긁적긁적하는데 어쩌겠어요. 돈 안 받고 다시 벤딩해 드렸어요. 그때 일이 고마워서 지금도 오실 때 음료수도 사 오고 빵도 사 오고 하세요.

주로 어떤 손님들이 오세요?
다방면으로 옵니다. 기계 만드는 분, 집 짓는 분, 농장에 일하는 분, 말 키우는 분, 돼지 키우는 분들이 와서 이 얘기, 저 얘기 해 주세요. 그런 분들은 비록 옷이 시꺼멓고 갈중이 입고 모자 쓰고 다녀도 몇 십억 몇 백억 가진 분들이에요. 말 주인이 가끔 오는데 잘 차려입지 않습니다. 그분 부자라도 사람 써서 일합니까? 경주마 육지 보내 돈 들어오고 해도 남에게 맡길 수가 없어서 말 새끼 낳는 일도 직접 하고, 용접해서 집 짓는 일도 직접 해요. 그럴 때 벤딩이 필요하면 와서 해 가면서 자신의 그런 얘기를 해 주세요. 예전에는 제가 상대방이 말을 시켜야만 말을 했는데, 이 일을 하다 보니 이제는 제가 먼저 말을 걸기도 합니다.

이야기가 넘치는 공간이에요.
그래서 많이 가져서 잘사는 건 아니지만 저 자신은 부자인 것 같아요.

벤딩 기계가 다른 공장에도 있나요?
공업단지 안에 세 군데쯤 있습니다. 그런데 다른 공장은 이것만으로는 밥 먹고 살 수 없으니까 벤딩, 절단, 절곡 등을 같이 해요. 돈을 크게 버는 것도 아닌 데다 하루 종일 일이 없는 날도 있어요. 경기가 좋아야 일이 있으니까요. 제주도는 이 일을 하기에 시장이 너무 좁아요. 그래도 제가 공장을 운영할 수 있는 것은 옆 공장에 일 맡기러 온 손님이 벤딩을 어디서 하냐고 물으면 우리 공장을 소개해 주기 때문이에요. 우리도 옆 공장을 소개해 주지요. 한 사람 땅에 우리 공장, 용접 공장 해서 여섯 집이 임대로 있어요. 서로서로 소개해 줍니다.

언제까지 공장을 운영하실 계획이세요?
2025년에 화북공업지역이 이전한다고 해요. 공업단지 이전 추진 모임이 있어서 공장마다 다니면서 이전할 사람들을 모집해요. 몇 평, 몇 평 하면서요. 2025년에 이전하게 되면 공장을 비워야 하니까 우리도 이전할 곳으로 가야 하는데, 그러기에는 여유가, 가진 것이 없어요. 그렇다고 젊었으면 모를까 이 나이에 대출받아 가기도 힘들어요. 아는 분들이 2,000평, 3,000평씩 가계약했어요. 그분들이 그곳에 공장 지어 저에게 임대하면 저도 그곳에 가서 계속 일할 수 있겠죠. 아니면 여기서 문 닫아야 해요. 2025년에 도에서 추진하면 다 이전해야 할 것 같아요. 이곳은 주택지로 개발되니까요. 없는 사람은 모두가 하는 대로 따라가는 수밖에 없어요.

앞으로 꿈이 있으세요?
꿈은 다 이루었다고 생각해요. 아프지 않아야 벤딩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지난해부터 수영도 하고 있어요. 공장을 해야지 손님도 볼 수 있고, 왔다 갔다 하며 보던 사람도 볼 수 있고, 세상 살아가는 말도 하고, 이렇게 와서 차 한잔 마시면서 요즘 정치 돌아가는 말도 하고, 이 공장 요즘 어떠냐, 요즘 경기 어떠냐 하며 안부도 물을 수 있죠. 남들은 가진 것이 있어야 좋다고 하는데, 저는 없는 것이 더 편해요. 또 제가 없어 봤으니 조금 있으면 남 주는 기쁨도 무시 못 하게 좋아요. 60을 넘어 보니 내가 열심히 노력해서 내 힘으로 살고, 조금 여유 있으면 남 주는 것이 최고라는 생각이 들어요. 또 즐거움이고요. 없는 사람은 남에게 조금만 줘도 굉장히 기쁩니다. 받는 것보다는 주는 게 더 기쁘니까요.

글: 김연주, 사진: 한용환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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