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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기섭

은분으로 스며드는 빛의 컬러(2020)

신작들은 레이어가 많이 보이네요. 단순히 은분의 명도차를 두던 방식에서 벗어나서 훨씬 다채로운 색을 구현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맞아요. 은분이 더 잘 드러나는 방법을 고민하다가 아예 색을 다 빼면서 투톤으로만 작업을 했어요. 거기에서도 은분은 색은 하나였어요. 불상을 그릴 때까진 투톤이었는데, 서양조각을 그리면서는 은분에 색을 좀 섞어 쓰기 시작했어요. 은분도 푸른 느낌이 나는 색이 있고, 금빛이 나는 색이 있고 그렇거든요. 저도 은분을 쓰면서 데이터가 많이 쌓이니까, 색을 쌓아서 올리고, 거기서 색을 넣는 것을 적극적으로 사용했어요. 예전에는 그림이 보였다가 사라졌다가 그랬었는데, 제가 이 신작을 하면서 스스로도 놀랐던 게, 바탕에는 푸른색을 많이 쌓았어요. 그런데 결과적으로는 금빛이 많이 보이더라고요. 금빛이 제가 가장 밑에 1도로 쓴 색인데, 그게 제일 많이 보이게 되더라는 건, 아직 제가 이 재료를 완전히 취하고 있지는 못하고 있다는 뜻도 되겠죠. 더 발전해 나갈 가능성이 있다는 뜻이기도 하겠죠. 

색을 많이 쓰게 된 것도 차이점인 것 같고, 예전에는 깍아내는 작업을 많이 하셔서 평면 조각, 납작한 부조같은 느낌이 있었다면, 최근작은 훨씬 회화적이 된 것 같아요. 소재 자체도 그렇고, 붓의 느낌을 살리는 방식도 그렇고요. 은분을 쓸 때는 이렇게 써야 돼, 라는 저만의 방식에서 많이 자유로워진 것 같아요. 그리다 만 것처럼 보이지 않게 하기 위해 저만의 가이드라인을 만들었던 것 같아요. 회화를 그리는 방식의 다른 지점으로 돌아서 갈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 같아요.

작년이나 올해 주력하고 있는 일이 영상으로 작업과정을 오픈한다던가, 대중들이 보이는 곳에서 작업을 한다는 식의 실험을 하고 있는데, 반응이 어떤가요? 그 프로젝트 제목이 <슬로우 벗 낫 슬로우>거든요. 영상을 소통을 위한 도구로 여겼을 때, 팔로워가 늘어야 하고 더 빨리 해야겠지만, 그런 맥락은 아니거든요. 저는 단 한둘이라도 본인의 일상과 저의 일상이 만나서 일이 진행된다, 정도의 가능성만 있다면 충분히 해 볼 만 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런 분들만 있어도 개인적으로는 작업할 때 힘이 됩니다. 특히 올해 코로나19 탓이 오프라인상에서 만날 기회가 많이 줄었잖아요. 혼자 막혀 있는 느낌이 들 수 있는 상황이었는데, 어쨌든, 그 시간에 저와 같은 시간을 보내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제가 작업을 할 때 힘이 되더라고요. 영상이 실시간이라서 바로바로 피드백을 볼 순 없지만, 영상이 끝나고 나중에 피드백을 들어요. 실시간 상영중에 전 작업을 하고 있기 때문에 창에 댓글이 올라와도 볼 수가 없죠. 게다가 전 이 영상 프로젝트가 끝나면 기록이 되지 않고 사라지길 원해요. 그림을 그리는 순간을 공유하고 싶은 것이기 때문에, 기록이 남을 이유가 없는 거죠. 그런데, 나중에 만난 분들이 그 영상을 보고 피드백을 주셨어요. 전시보고 작품에 대한 피드백을 주는 과정하고 비슷하더라고요. 영상을 보시고는 자기가 직접 작업을 한 것처럼 느끼는 분도 계시더라고요. 흰 캔버스에서 시작해서 작업을 덮는 것까지 지우는 것까지 다 같이 봤으니까요. 

온라인으로 작업과정을 먼저 보고, 작품을 보는 게 신기한 경험이시겠네요. 이 작업 이후엔 해보고 싶은 게 있나요?  가장 가깝게 작업의 한 꼭지를 정리하면서 이번에 개인전을 열거든요. 이 개인전 준비하는 중에 투톤으로 만든 작업이 있어요. 이 작업을 파노라마 방식으로 전체 풍경을 담아보려 해요. 이 작업을 목공하는 작가와 2인전으로 풀려고 하는데요. 목공하는 친구가 조형작업으로 공간을 쓴다면, 저는 그 배경을 쓰는 방식으로 하려고 해요. 최근에 화폭을 여러개 연결하는 작업을 꾸준히 해왔는데요, 이제는 20개 정도의 풍경을 넓게 연결하는 작업을 내년 전반기에는 내내 하고 있을 것 같아요 

재료, 색, 전시형식, 소재를 바꾸는 식으로 끊임없이 변화하는 시도가 흥미롭네요. 기억을 더듬으면서 그렸다는 표현을 하기 위해, 기억의 순간이 빛나게 느껴지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 재료적으로 은분을 선택했던 것인데요. 이제 많은 분들이 빛을 담는다고 말씀해주시더라고요. 평면에서 빛을 담을 때 어떤 형상으로 보여졌을 때 내가 생각하는 빛을 담을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되고, 그 맥락에서 계속 새로운 작업들이 나오는 것 같아요. 

은분의 화가라기 보다는 빛의 화가라는 표현이 더 정확하겠어요. 은분을 쓰지만, 그게 반사되어 우리에게 보이는 색깔이 다 달라지는 거잖아요. 

이제까지 받았던 묘사 중에서 가장 적확했던 표현은 뭔가요? 7년 전에 촬영을 했던 감독님이 계세요. 그때는 은분을 전면에 쓸 때가 아니었는데요. 이번에 그 분과 다시 촬영을 하게 됐는데, 그 분이 처음 새로운 작업을 보시고 한숨을 쉬시더라고요. 촬영을 하셔야 하는데 은분 밖에 없어서 촬영이 힘드셔서 그런 것 같은데요. 그 분이 빛을 담는 그릇이라는 표현을 해주셨고, 저는 그 말이 맞는 것 같아요. 그릇이라면 그 그릇에 무엇을 더 담아야 할까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됩니다. 같은 빛이 오더라도 색이 다르게 보였으면 좋겠다는 점에서, 은분의 색을 더 쓰게 되는 것 같아요. 

이 시점에 영상으로 남기고 싶은 말이 있나요? 그림 그리는 시간 자체가 소중하다고 생각하거든요. 많이들 제 그림을 처음 볼 때는 그림을 그리기 전단계라고 생각하다가, 나중에는 이런 이미지가 있구나 하고 느끼시게 되는 것 같아요. 그림 앞에 있는 시간에 따라 느끼는 게 전혀 달라지는 그림이기 때문에, 제가 그림 앞에서 서성인 시간만큼 관객들도 그림 앞에서 많이 서성여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인터뷰·글 이나연   사진 한용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