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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라지업

hanra paper

PROFILE

좌인순 대표
1951년 제주시 칠성통에서 출생
서울 한국 컴퓨터센터 근무
진해통제부 전산실 근무
한라지업사 창립 및 현재까지 ㈜한라지업 대표
2018 제주경제대상 부문상

세상에 공짜는 없어요. 투자는 기본이죠.

불모지에 뿌리를 내려 잎 푸른 무성한 나무로 서는 일. ㈜한라지업의 모습이 그러하다. 외롭고 매서웠던 지난 1994년을 돌이켜본다. 7년 후 6월, 법인 전환의 온화한 바람은 여성이자 어머니인 좌인순 대표의 표창이었다. 화북공업단지 내 930평의 빈 땅은 어느덧 1500평의 쓰임 있는 땅으로 확장됐다. 길게 10만원을 겨우 찍던 매출은 현재 20억에 가까운 매출액 증가로 승승장구하고 있다. 길게 보는 그녀의 안목 덕이었다.

가정주부였다가 사업에 뛰어든 셈인데, 창업은 어찌 결심한 건가요?
제가 원래 지하상가에서 장사했어요. 이른 아침부터 밤 늦게까지 일했죠. 아이들이 어리니까 친정어머니가 이 점을 항상 안쓰럽게 여기셨어요. 어머니 지인분의 제본 사업과 관련된 이야기를 듣고, 제게 지업사를 제안하셨죠. 오후 6시 반이면 일이 끝나니까 아이들 돌보기에도 좋았어요. 당시 우스갯소리로 종이 장사를 하면 책상에서 돈만 세면 된다고 했죠.(웃음) 사실은 아니었지만요.

어떤 장사를 했었나요?
레코드 가게를 했어요. 자식이 넷인데, 막내가 태어나고 1년 후쯤 장사를 했죠. 결혼 전에는 서울의 한국 컴퓨터센터에서 근무하다가 특채로 뽑혀 진해 통제부로 내려가 슈퍼바이저 일을 맡았어요. 제주에서 결혼한 후 가정주부로 있다가 레코드와 비디오 가게를 했고, 제주시로 이사 오면서 두 군데 레코드 가게를 운영했어요. 우리은행 밑 지하상가의 아바 레코드, 동문시장 밑 화성 레코드였죠. 이후 한 군데만 운영했는데도 아이들 도시락 싸는 일조차 버거워져 창업에 눈을 돌렸어요.

지금 이 자리에서 시작했나요?
네. 남편이 선생님이었는데 제주시로 전임하면서 시작했어요. 이곳은 원래 결혼 전부터 남편이 저축해 산 땅이에요. 사업하면서 차츰 확장했죠. 처음엔 자동차공업사를 할 계획이었어요. 당시 자동차공업사가 추첨제였는데, 당첨도 되었죠. 그런데 임차인이 계약기간이 지나도 나가지 않아 당첨된 사업 유효기간마저 넘기는 바람에 계획을 접었죠. 법적 절차를 밟아 다시 이곳을 찾은 후 94년에 건물을 지어 시작했습니다.

당시 이곳은 어떤 풍경이었죠?
동화로 쪽만 빼곡하게 기업이 들어왔을 뿐, 여기 선반로 부근엔 아무것도 없었어요. 지금의 입구 쪽은 나무가 무성했죠. 입구 바깥쪽엔 ‘장흥철재’란 곳이 있었고, 듬성듬성 건축물이 있었죠. 우리가 들어온 게 공업단지가 조성된 후였는데도 그랬어요. 이후 몇 군데 식당이 바뀐 것 외에 들어온 업체가 크게 바뀐 것은 없는 듯해요.

다른 업체와 소통할 일이 있는지요?
업종별로 다르겠지만, 우리는 지류를 취급하다 보니, 학교나 관공서, 인쇄 쪽과의 소통으로 제한되어 있어요. 화북공업단지 내 다른 업체와 소통할 일이 드문 거죠. 참 외롭게 성장해온 것 같아요.

많이 힘겨웠던 만큼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많을 듯한데요.
무엇보다 일할 사람이 부족한 게 힘들었어요. 사업을 확장해 한창 자리를 잡아가던 <한라제본>을 양도할 수밖에 없었던 것도 같은 이유였죠. 2011년 후반, 제가 간 담석 질환으로 서울에 수술하러 올라갔어요. 그런데 그사이에 직원이 다 나가버린 거예요. 이쪽 방면의 근로자는 월급을 받고 출근하지 않는 경우가 허다했어요. 기술을 가르쳐서 일했건만, 힘이 빠지는 일이죠. 더불어 한 가정의 아내이자 여성이기에, 맘 편히 사업을 펼칠 수 없는 말 못 할 애환도 있었어요.

지업 분야에서의 첫발을 내딛기 역시 쉽지 않았을 텐데요.
당시 두 군데 지업사가 있었는데 가격경쟁이 붙은 거예요. 적자 장사를 계속할 수밖에 없었어요. 상대 회사에서 버티지 못하던 시점이 왔고, 그 후 바뀌게 되었죠. 지금은 우리 기업이 어느 정도 궤도에 올랐고, 성실한 서비스 제공으로 앞서 나갔어요. 불현듯 지금도 인쇄소를 하는 한 거래처가 기억나네요. 그분이 팔아준 하루 10만원 매상이 전부인 적도 있어요.

사업을 하면서 다른 방향으로 전환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요?
제가 꿈이 컸어요. 뭔가 한 번 하면 끝을 봐야지, 생각했죠. 여성이기에 신발 끈을 더욱 조인 점도 있어요. 원래 가진 꿈은 디자인부터 납품까지 하는 원스탑 사업이었어요. 그런데 순서가 틀려 버렸죠. 인쇄소가 먼저 들어와야 하는데, 제본을 먼저 시작했어요. 주변에서 인쇄소를 하면 종이를 못 판다는 말을 듣고 제본부터 건드린 건데, 인쇄소부터 해야 했다는 걸 추후에 깨달았죠. 이젠 나이가 들어 아쉬운 대로 이 꿈은 접었어요.

워낙 열정적이라 일찍 하루를 시작할 것 같아요.
우리 회사는 오전 8시 반 출근, 오후 6시 반 퇴근인데요. 저는 오전 6시면 집에서 나와요. 오전 6시 30분에 중앙성당에서 미사를 보고 묵상을 좀 한 뒤 오전 7시 20분이면 여기 책상에 앉죠. 점심 이후에나 차를 마시는 여유를 부려요. 돌아와 어느 거래처에 어떤 물건이 나가는지, 매출은 제가 꼭 파악하죠.

일터로서 화북공업단지를 어떻게 생각하세요?
뭐랄까. 일하는 입장에서 좋은 조건은 아니에요. 그러나 내 일터니까 익숙해졌고 좋아하려고 해요. 다만,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과 실제 화북은 좀 달라요. 시내 쪽에 있는 사람은 화북 자체를 변두리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제는 제주시 규모가 커지기도 했고 교통도 제법 좋아져서 시내와 큰 차이가 없거든요.

화북공업단지에 대한 이슈가 있는데, 계획이 있는지요?
구태여 이동할 필요는 없는 것 같아요. 우리 업종에서 가장 어려운 게 배달과 외상 문제예요. 물류 중 90% 이상 배달을 해야 하죠. 위치를 옮기면 배달하는데 어려움이 많아집니다.

한 기업의 대표로서 생활신조를 듣고 싶어요.
이 사업을 시작할 때 어른들이 3년만, 5년만 견디면 된다고 했어요. 저는 하는데 10년은 견뎌야 하더라고요. 모든 건 10년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딱 10년이 되니까 가닥이 잡히기 시작했거든요. 말하자면, ‘세상에 공짜는 없다.’예요. 어떤 것을 해도 투자를 하지 않고서는 얻을 수 없다는 거죠. 그 투자는 돈이든 시간이든 말이에요.

글: 강미승, 사진: 한용환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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